이 글은 중앙M&B에서 나온 "다치바나 다카시의 탐사저널리즘"(황영식 지음)이란 책에서 뽑은 글입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소개


다치바나 다카시는 1940년 5월 나가사키(長崎)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필명과 발음은 같지만 한자는 다른 橘隆志. 1968년부터 현재의 필명을 사용해왔다.
다치바나(橘) 가문은 이바라키(茨城)현 미토(水戶) 일대에서는 유명했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낭인이 정착해 염색집을 열었고, 이 염색집에서 갈라져나온 목재상이 바로 그의 집안이지만 할아버지대에 거의 몰락하다시피 했다.
미토의 다치바나 가문에서는 전쟁 전에 다치바나 다카사부로(橘孝三郞)라는 우익 사상가가 나왔다. 미토에서는 처음으로 일고(一高)에 들어간 것으로 유명했던 그는 오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미토로 돌아와 농촌청년을 위해 애향숙(愛鄕塾)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웠고, 다치바나 일족이 이를 총지원했다. 다카사부로의 사상적 근원은 농본주의라고 할 수 있었느나 갈수록 천황주의적 경향이 강해졌다. 그는 다카시의 당숙뻘이었다.
아버니 다치바나 노리오(橘經雄)는 와세다(早稻田) 대학 국문과 출신으로 졸업 직후 나가사키의 기독교계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이 학교는 총각교사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나가사키 부임을 앞두고 미토의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누님(다키시의 고모)의 애제자인 류코(龍子)라는 여학생과 결혼했다. 다키시는 이들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카시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는 문부성 관료가 됐다. 다카시가 만 2세 되던 1942년 중국 베이징(北京)의 일본계 사범학교 부교장으로 부임했다. 다카시도 제 2차 세계대전이 끌날 때까지 중국에서 지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온 다치바나 일가는 이바라키 현 히가시이바라키(東茨城)군 나카니시(那珂西)에 있던 외가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이듬해 미토로 옮겨간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단신으로 도쿄(東京)로 올라가 전국출판협회라는 단체 사무국에 들어가 기관지인 ≪전국출판신문≫의 편집장이 된다. 이신문이 나중에 ≪독서타임즈≫로 바뀔 때까지 편집장을 맡았으나 나중에 ≪독서신문≫과 합병해 ≪주간 독서인≫이 되자 이와타니 오니시(巖谷大西)씨가 편집장을 맡고 아버지는 영업직으로 돌아야 했다.
다치바나가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게 된 것도 이런 아버지의 영행을 무시하기 어렵다. 그의 아버지는 애초에 소설가 지망생으로 대학 졸업 후 줄곹 소설을 써오다가 ≪주간 독서인≫ 시절에는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 또한 사회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대도시가 싫어서' 또 '아이들 교육을 위해' 미토에 남았던 어머니는 자유학원(自由學園)의 설립자이자 잡시 ≪부인의 벗(婦人之友)≫창간자인 하네히토 모토코(羽仁もと子)의 추종단체의 '벗의 모임(友之會)'의 활동가였다. 그렇다고 특별히 자녀교육에 있어서 자유방임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할 일을 정확히 하도록 시켰다. 교육에 대한 열성도 대단했다.
다치바나가 이바라키 사범학교(이바라키 대학 교육학부의 전신)부속 초등학교를 거쳐 같은 부속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는 이바라키 사범학교 교수에게 상당한 돈을 주고 영어과외를 시켰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한 것이었다. 그것도 영어 해석과 영어 작문 선생님을 따로따로 붙었다. 이런 어머니의 배려로 다치바나는 외국어에 대한 자신감과 흥미를 가질 숭 ㅣㅆ었다. 1956년 중학교를 마치고 지방명문인 이바라키 현립 미토(水戶)제1고등학교에 입학했던 다치바나는 이듬해 집이 치바(千葉)현 가시와(柏)시로 이사함에 따라 도쿄 도립 우에노(上野)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수재 소리를 들었고 특별히 공부때문에 고생한 일은 없었다. 다만 타고난 음치였던 관계로 음악성적은 늘 최하위였다. 중학교 1학년 이후에는 아예 시험시간에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나중에 ≪분게이순주(文藝春秋)≫입사시험에서도 면접시험에 노래 부르는 것이 들어있었으나 거부했다.
반면 체육과목에서는 달리기나 구기는 소질이 없었으나 넓이뛰기, 높이뀌기에는 빼어난 실력을 보였다. 중학교 때 육상부에서 높이뛰기와 삼단뛰기 선수생활을 했고 기록도 뛰어나서 일본 전국에서 1,2위를 다투어 중학생 선수로서는 유명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선수생활을 계속했으나 전학한 도쿄 도립 우에노 고등학교에 육상부가 없어 운동을 그만두었다.
그의 독서열은 뿌리가 깊다. 1995년 말 베스트셀러가 됐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대한민국에서는 일부가 번역되 2001년 9월 출판하였다.)에서 그는 중학교 3학년때 쓴 <나의 독서를 되돌아본다>는 그을 실었다. 학교에 들거가기 전부터 시작된 책 편력에 대한 것이었다.(생략)
(생략된 부분은 <나의 독서를 되돌아본다>글은 대한민국에서 발간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찾아보기시 바랍니다.)
그는 특히 중학교1,2학년때를 "다독(多讀), 남독(濫讀)의 시대였다."며 일본과 세계의 고전 이름을 무수히 들었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로부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까지 많은 책 이름을 들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은 기대했던 정도의 작품은 되지 못했다. 대개 '이건 훌륭한 작품', '저건 세계적 명작'이라는 권유나 독서평에 따라 기대를 품고 읽어보면 실망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많다. 괴테의 시가 좋아 몇 번이고 읽었다. 그의 시는 내게 슬플 때, 즐거울 때, 외로울때, 기쁠대, 괴로울 때 시를 짓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또 같은 책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떤 의미에서 인생에서 가장 책을 읽지 않는 것 아니냐. 시험공부에 시간을 빼앗기게 되니까'"라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래도 읽기는 제법 많이 읽었다."
다치바나의 이런 독서경력은 문과 쪽 취미가 강했음을 시사하지만 실제로는 앞에서 밝힌 대로 이과 지망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다케우치 히토시(竹內均)-(※이 책저자는 竹內均을 다케우치 나라스라고 읽고 썼다. 그러나 제대로 읽는 일본식 음은 다케우치 히토시이다. 그는 지구물리학자로 일본에서 발행하는 과학잡지 NEWTON(한국, 대만등의 세계 여러나라에 번역되 출간하는 과학 잡지)의 발행인으로 2004년 4월 죽을때 까지 NEWTON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였다.)가 쓴 두권짜리 ≪현대 과학 이야기≫가 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자극했다. 분자나 원자니 하는 당시로서는 첨단의 과학 이야기를 다룬 이책을 읽고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 하나 ≪에디슨 전기≫란 책에도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미토에서의 중학교 시절 늘 동네 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서서 읽고 좀체 책을 사서 읽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를 졸라 이 책만은 사서 읽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진학지도 교사로부터 색약이어서 이과 진학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 낙담했다는 애기는 앞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그 순간 그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법학부나 경제학부에 들어갈 생각을 추호도 없었다. 관료가 된다든가, 회사원이 되는 인생의 경로는 머릿속에 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까닭인지 '과학자가 될 수 없다면 저널리스트가 될까' 하는 생각은 있었다. '기자는 참 훌륭하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도쿄대학 문학부에서 불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그는 공부와 독서에 열중했다. 특히 '무엇이든 시대의 유행에 등을 돌리는' 성벽때문에 남들이 피하거나 소홀히 하는 분야일수록 파고들었다. 졸업논문 주제도 '메느 드 빌랑'이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혁명 시대의 철학자였다.
대학시절 그는 시를 써서 발표하고 대학신문 현상공모에 소설을 써내기도 했다. 시는 본면으로 썼지만 소설은 '미즈치'라는 필명을 썼다. 소설에 몰두한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문학부 학생들은 누구나 작가 지망생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같은 불문과 4년 센배였던 관걔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글을 써서 그를 능가하자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었다고 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교내의 '은행나무 가로수상' 2등, '오월제상' 1등을 받은 반면 다치바나는 모두 장려상에 그쳤다.
1964년 졸업과 동시에 취직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오에 겐자부로를 능가하겠다는 꿈은 무산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금 일본에서 다치바나의 영향력은 오에 겐자부로를 크게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졸업과 동시에 분게이순주(文藝春秋)사에 입사, ≪슈간분춘(週刊文春)≫에 배치됐다. 특집기사 담당으로 당시 제법 인기있던 <이 사람과의 일주일>이라는 연재 특집기사를 주로 썼다. 화제의 인물을 일주일 동안 따라다니며 이모저모를 알리는 기사였고 자연히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부드럽고 쉬운 기사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66년 사보에 '퇴사의 변'(※주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 실러 있습니다.)을 싣고는 돌연 사직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월급이 너무 적어 생활이 어려웠던데다 입사 3년째를 넘으면 감히 그만둘 엄두를 못내고 그자리에 붙잡히리하는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듬해 도쿄대학 철학과에서 학사편입한 그는 한동안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나 거의 대부분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철학공부에 빠져 소설가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나중에 그는 이에 대해 어렇게 회고했다.
"나에게는 바람기 같은 것이 있다. 하나의 소설을 쓰기 시작해 환결할 때까지 잡고 있지 못했다. 도중에 다른 것이 쓰고 싶어져 이리저리 옮게가는 버흑이 있어 미완성 작품이 부지기수였다. 또 역시 소설가란 차근차근 써나가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소설가의 소질이 없다는 판단을 했던 셈이다.
또 하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간지 기자로서 현실세계 끝까지가 깊숙한 곳의 싶이, 어두운 곳의 깊이 같은 것을 대하다 보니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에 돌아와 철학을 정말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문학 따위는 시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실과 철학의 세계에서 보니 문학은 대단히 몹쓸 일이었다.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학시절은 일본 학생운동사에서 최대의 격동기였다. 1960년의 안보투쟁 이래 해마다 대학은 소요로 시끄러웠다. 더욱이 분게이순주(文藝春秋)사를 그만두고 철학과에 학사 편입한 이듬해인 1968년에는 바로 도쿄대학 휴교사태를 부른 '전공투 운동'의 해였다. 그러나 두 번째 대학생활에서 그는 현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나의 관심은 완전히 현대에 등을 돌리고 있었고 고대로부터 중세에 걸친 사상가, 그중에서도 특히 신비주의자들에게 쏠려 있었다. 자연히 관심은 한편으로 고대사로부터 역사 이전의 시대, 고고학으로 향했고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성립과정으로부터 구약성서학과 오리엔트 이교, 인도의 고대사상으로 기울었다. 더욱이 유럽의 암흑기에 고대의 사상적 후계자로서 그것을 다시 활짝 피었던 이슬람 사상가들과 페르시아의 신비 시인들에게까지 관심이 쏠렸다.
당시 내 머리는 그리스어, 라틴어, 헤브라이어를 쑤셔넣기에 바빴고 스스로가 살고 있는 현대라는 시대에 대해서는 거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대를 초월한 세계 속에서 놀면서 사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현대사회에 참여(engage)하는 따위는 엿먹어라 하는 것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대할 때의 내 기본적인 심적 접근법이었다. 나는 완고하게 시대를 거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해 대학에 남으려던 생각에서 시작된 그의 철학공부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다른 수입원이 없었던 그는 철학과 시적에도 ≪슈간분순(週刊文春)≫에 연애소설을 기고하고 ≪영레이디≫의 앵커(특집기사를 맡아 총정리하는 역할)로서 일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전공투 열풍에 말려 도쿄대학이 휴교를 하고 휴교기간의 수업료 문제로 옥신각신 실갱이가 벌어지면서, 그는 수업도 하지 않았는데도 수업료를 내야 한다는 학교측의 주장에 반발, 학교를 그만두었다.
당시 대학의 모습에서 많은 실망을 느낀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대학 교수가 된다는 것이 영 신통찮아 보였다. 우선은 도쿄대학 휴교 당시 교수들의 어정쩡한 태도를 보아야 했고, 대학원 수업을 도강하면서 학교 또한 연줄과 파벌이 판을 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 학계의 보스격인 도쿄대학교수가 잚은 학자의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보스와 좋은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좋은 대학에 취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학교를 그만둔 그는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1960년 '안보투쟁'주역들의 이야기나 전공투 운동에 대해 글을 썼고, 차츰 범위를 '생물학 혁명'같은 쪽으로 넓혀나갔다. 당시 갓 창간된 ≪쇼쿤(諸君)≫이 다치바나의 밥벌이를 위한 글쓰기 작업을 지탱했다. 주로 '기상이변'등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을 다루었다. 다치바나(立花)란 필명을 쓰기 사작한 것도 이때였다. 위낙 다양한 내용을 다달이 쓰다보니 잡지사측에서 또 다른 필명을 귄해 기쿠이리 류스케(菊入龍介)랑 필명도 사용했다.
1972년 들어 그는 이스라엘 여행을 떠나 중동지역을 방랑하고 한 여자에게 빠져 수없이 많은 연애편지를 쓰며 마음의 방황도 겪었다. 신주쿠에 스탠드바를 열어 반 년간 운영하기도 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평생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는 확고한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연구'를 계기로 그는 도저히 발을 뺄 수 없을 만큼 언론인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이후 변함없이 외길을 걸어왔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평론가, 논픽션 작가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면서 독자적인 조사보도 방법론을 정착시킨 '특종기자'라는 인상도 많이 지워졌다.
그러나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일상어로 발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죽는 날까지 '기자'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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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8
이 들이 말하는 '다치바나와 같은 사람'은 결코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다치바나, 즉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와 ≪공산당연구≫, 그리고 ≪록히드 재판을 재단한다.(현재 '논박'으로 바뀜-우리나라에 번역이 안됌)≫등의 정치적인 뉴스를 깊이 파고들었던 다치바나의 모습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1980년대 후반 들어 현대과학과 문명의 문제로 지평을 넓혀가면서 폭넓고도 깊은 지식과 교양을 과시한 다치바나의 모습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다치바나의 변신은 1980년대 들어 시작됐다. 이 같은 변신을 통해 그는 '특종기자', '권력과 싸우는 언론인'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일본 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됬다. 그리고 그 변신의 방법은 그 동안의 조사보도 방법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사보도의 대상을 확대한 결과, 심층 과학 저널리즘의 대해로 접어든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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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산지는 2004년 12월 18일 토요일입니다. 이 책은 강동도서관에도없었고, 교민문고, (강남, 광화문)교보문고, (종로, 강남)영풍문고, 리브로등 대형서점에서도 절파능로 안 파는 책입니다. 이 책은 반디앤루니스(옛 서울문고)에서 재고가 단 하나밖에 없어 제가 산 다음은, "절판이라 책을 구할수 없음니다"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구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입니다.

한국일보 도쿄특파원이던 황영식씨가 다치바나 다카시에 흥미를 느껴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삶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단 중간 부분은 제가 일본 정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계속 넘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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