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mer님의 블로그글를 참고로 하였습니다.

전길남 KAIST 교수
한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이끌었다.

오마이뉴스 기사 URL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menu=c10600&no=219001&rel_no=1
↑ PC사랑2005년 4월호에도 나오는 기사입니다.
올블로그에서 전길남 KAIST 교수라 나온 것을 클릭해서 봤더니 우리나라 인터넷의 기반을 세운 전길남 KAIST교수님을 소개하는 포스트였습니다.

대한민국이 IT강국이 되기까지는 전길남교수님의 공의 크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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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저는 ZDNETKOREA입니다.
[안윤호의 Digital 評傳] 제프 라스킨과 리얼 매킨토시
원문보기
안윤호 (아마추어 커널 해커)
2005/03/11


애플컴퓨터의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제프 라스킨이 지난 2월 26일 61세로 타계했다. 췌장암이 사인이었다고 한다.

필자는 대단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과 함께 복잡했던 라스킨의 작업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얼마 후 많은 컴퓨터관련 웹사이트들이 대대적으로 라스킨의 작업을 재조명했다.

컴퓨터 혁명기인 1980년대 초 매킨토시의 초기 기획자로서, 그리고 여러 종류의 책의 저자이기도 했던 라스킨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매킨토시의 탄생 과정에서 라스킨은 컴퓨터를 가전기기와 같이 사용이 쉬운 기계로 설계할 것을 강조했으나 프로젝트 후반에 잡스와의 의견 차이로 애플을 떠났다.


제프 라스킨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매킨토시 팀에 대한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PARC의 기술을 애플에 끌어다 댄 장본인도 라스킨이었다. 잡스가 만들어낸 매킨토시는 더 커진 램과 마우스 그리고 잡스의 심미안을 반영한 특유의 디자인을 반영했다(필자는 이전에 ‘MS-애플「GUI 경쟁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라스킨의 입장은 컴퓨터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쉬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비싸서도 안됐으며 작고 간단해야 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크고 빠르고 복잡한 기종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라스킨은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복잡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매킨토시 개발에 대한 라스킨의 입장을 정리한 글은 ‘Holes in the Histories’라는 제목으로 http://jef.raskincenter.org/published/holes.html에 정리됐는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하지만 만약 라스킨이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게 됐으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매킨토시와 GUI의 세상을 만나게 됐을 것이다.

우선 라스킨은 마우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마우스를 이용하면 편리해 보일지는 몰라도 손의 기능을 100% 살릴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정작 마우스의 발명자인 엥겔바트 역시 마우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마우스는 앞으로도 사람과 컴퓨터의 교감에 있어서 중요한 방해물이 될지도 모른다. 미니멀리즘을 중시하는 그에게 있어 마우스조차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독자들은 마우스 없는 PC나 매킨토시를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캐논 캣 - 리얼 매킨토시(Real Macintosh)라고도 불린다. 지금도 캣의 애호가들은이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이스 바 밑에 두 개의 특별한 키가 보인다. 립(Leap)이라고 부른다.

컴퓨터 분야에서 라스킨의 최대 관심사는 워드 프로세서였다. 사람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중요한 이유는 결국 자료의 정리에 있고 워드 프로세싱보다 중요한 작업은 없다고 본 것이다.

사실 워드 프로세서보다 더 중요한 애플리케이션은 없을 것이다. 모든 중요한 작업은 자료들을 워드프로세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라스킨의 논점은 이 중요한 작업에서 키보드의 키를 잘 쓰는 일이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본 것으로 아예 특별한 키보드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만든 적도 있다.

라스킨이 만든 회사 인포메이션 어플라이언스(Information Appliance)는 무척 효율적인 키보드의 사용법을 개발해서 판매에 나섰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나중에 개발한 캐논 캣(Canon Cat)도 파격적인 제품이었으나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20년이 넘도록 계속 진행돼 아키(Archy)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지속되었고 올해 후반에 발표될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그의 아들인 아자 라스킨이 아키를 진행하고 있다.

“아키는 단순한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다”라고 시작하는 프로젝트의 설명은 역시 라스킨이 쓴 THE(The Humane Environment)라는 책의 설계 철학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THE에서는 기존의 윈도우 메타포가 효율적이지 않으며 보다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키는 파이썬(python)을 사용해서 구현됐다. 데모화면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최초의 애플광고
어쩌면 라스킨의 말처럼 우리는 훌륭한 워드프로세서도 없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복잡한 화면, 너무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라스킨의 초기 워드 프로세서는 작은 수의 명령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10개 내지 15개 정도의 명령만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라스킨의 생각이었다.

이후에도 그의 근본적인 생각은 바뀐 적이 없다. 라스킨에게는 복잡한 ‘기계(machine)’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 줄 ‘기구(appliance)’가 필요했다. 그때와는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뀐 요즘에도 기계와 기구의 구별은 종종 모호하여 진정한 기구의 구현은 뒤늦게 이뤄지곤 한다.



필자는 휴대전화나 PDA를 볼 때마다 본질적인 기구로 얼마나 진화해가고 있는지 되묻곤 한다. PC도 마찬가지이다. 어플라이언스를 만드는 과정인 프로그래밍이나 설계 역시 너무 복잡하고 거추장스럽게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유비퀴터스 컴퓨팅이라는 개념과 인포메이션 어플라이언스를 주장한 라스킨의 관심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8비트가 사용되고 16비트의 CPU들이 세상에 조심스럽게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당시에 그의 주장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반대로 요즘에는 라스킨의 관점이 전혀 새로워 보이지 않는 것은 라스킨의 생각이 알게 모르게 성공적으로 세상에 파고 든 것을 의미한다. 독자들이 호기심을 느낀다면 그의 웹사이트였던 JefRaskin.com에 들러서 컴퓨터와 사람의 인터페이스를 집요하게 추구했던 라스킨의 글들을 읽을 수 있다.

컴퓨터 업계를 일찍 은퇴하고 의욕을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라스킨은 말년까지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책의 집필도 계속됐다. 때로는 모형 항공기의 디자인에 대해 빠져들기도 했고 새로운 RC조종기의 설계와 구현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라스킨의 이야기의 범위는 매우 넓고 쉽게 쓰려고 애를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들은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떤 글들은 벅민스터 풀러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심리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인지과학으로 학위를 받고 다시 컴퓨터로 빠져든 라스킨의 인터페이스 철학은 매우 특이했다. 때로는 철학을 넘어 윤리(ethics)의 수준까지 이르기도 했다.

좋은 디자인을 하나의 도덕적 의무로 보았고 인터페이스 디자이너의 윤리수준이 외과의사의 철두철미함 수준에 이르기를 바랬다. 나쁜 시스템 디자인은 사용자의 작업 내용을 해치거나 작업할 흥미를 잃게 만드는 것으로 역시 작업에 해를 가하게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나중에는 ‘cognetics’라는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 용어는 "the ergonomics of the mind"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공학이 효율을 개선시킨 것처럼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의 지적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봤다. 피아노나 다른 악기들의 경우를 보면 연주자의 몸과 완전히 밀착되는 것으로 창조적 생산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작업들을 간단하고 쉽게 만들어 주려고 했던 제프 라스킨은 반대로 매우 복잡하게 살았다. 이력서가 복잡한 것으로는 라스킨을 따라갈 사람이 별로 없을 듯하다. 컴퓨터는 그의 여섯 번째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수학, 철학, 음악, 그리고 물리학을 공부했다. 철학박사를 따기 위해 공부하다가 컴퓨터 사이언스로 석사학위를 따고, 음악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다가 미술교수가 된 후 스탠포드의 인공지능연구실에서 객원 학자가 되기도 했고 후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에서 지휘를 하기도 했으며 음악도 가르쳤다.

그럴 즈음 퍼스널 컴퓨터가 나와서 라스킨의 욕구를 자극했다고 한다. 라스킨은 컴퓨터 매뉴얼들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애플을 포함한 다른 회사들의 매뉴얼을 써주는 것으로 컴퓨터 업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필자는 라스킨이 오래 살아서 초기의 꿈의 연장선인 아키가 어떤 반응을 얻는가를 봤으면 했다. 이제 상업적인 성공 뿐만이 아니라 라스킨이 아키라는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피드백을 얻을 수도 없게 됐다. 그리고 그의 용감하고 새로운 도전을 구경할 기회도 함께 없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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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벌식과 한글 사랑을 위한 삶 - 공 병우 박사님


살아계실 때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글 기계화를 위해 온 삶을 다 바친 공 병우 박사님.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우리 나라에서 으뜸가는 임금님이라면, 그 한글의 올바른 기계화를 위해 힘쓰신 공 병우 박사님은 한글 나라, 세벌 나라에서 으뜸가는 임금님입니다.

하루 빨리 세벌식이 표준으로 되어 공 병우 박사님께서 편히 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돌아가신 공 병우 박사님의 삶(줄임)

1906년 평안북도 벽동 출생
1926년 평양의학강습소 수료
1927년 2월 신의주 도립병원
1928년 10월 경성의전 부속병원 안과
1936년 일본 나고야대(名古屋大) 의과대 의학박사
1936년 조선의사시험 합격
1937년 10월 황해도립 해주병원 안과 과장
1938년 9월 ~ 1980년 공안과 병원 원장
1949년 세벌식 한글 타자기 발명
1952년 한글학회 이사
1957년 ~ 1958년 한글학회 고문
1957년 ~ 1958년 한글타자기 발명
1967년 한영 겸용 타자기, 한영 겸용 전신타자기 발명
1969년 공 병우타자기연구소 소장
1971년 7월 맹인재활센터 설립. 이사장(성내동)
1971년 맹인 점자 타자기, 중국 주음부호 타자기 발명
1975년 볼타자기 개발
1978년 한글모노타이프 발명
1981년 공 병우 글자판 연구소 소장
1985년 직결식 한글전산글꼴 발명
1988년 한글문화원 원장
1992년 공 병우 직결식 시스템 개발
1993년 세벌 글자꼴 명함만들기 개발
1994년 9월 세종대 명예문학박사
1995년 3월 7일 돌아가심


공 병우 박사님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보기
(전 상도 님 누리집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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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시절 빌게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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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시대를 연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컴퓨터 원리'를 창안한 사람은 '튜링 기계'라는 개념을 만든 앨런 튜링이다. 탁월한 수학자이며, 전산학자(컴퓨터 과학), 철학자 암호분석가이다. 게이(Gay)라는 이유로 비극적인 최후를 마쳤다.

앨런 튜링은 1912년 6월23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린 앨런과 형 존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 공무원으로 파견나간 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두 형제는 퇴역군인인 워드씨 가정에 맡겨졌다. 1년에 한번정도 부모님이 찾아왔지만 서먹서먹했다고 한다. 결국 튜링은 부모의 애정이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앨런은 어려서부터 숫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사립기숙학교인 헤이즐 허스트에 입학한 앨런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10살때 선물 받은 에드윈 브루스터의 책은 앨런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생물을 기계가 구성되는 것처럼 풀어서 설명한 이 책은 훗날 그의 연구에 영삼을 준다. 1926년 셔본의 사립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역시 학교생활에 작 적응하지 못한다. 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앨런은 15살 때 역(逆)탄젠드 함수의 계산 형식을 혼자 발견했다. 독학으로 수학을 습득한 앨런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비평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때 그의 첫사랑이며 역시 수학에 뛰어났던 크리스토퍼 모르콤을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튜링의 동성애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르콤은 감염된 우유를 먹어서 소(牛)결핵의 합병증으로 19세에 사망한다. 튜링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곧 마음을 다잡는다.
모르콤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게된 튜링은 '정신의 속성'이란 책을 쓴다. 1931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 입학한다.
1934년 '중심극한정리'를 증명했지만 독일 수학자 린데베르크가 이미 1922년 증명한 것이었다. 1936년 2년간의 예정으로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간다. 1937년 튜링은 컴퓨터 설계의이론적 기초가된 획기적인 논문「계산가능한 수와 결정가능성 문제에 대한 응용」을 발표한다.
튜링의 논문을 본 프린스턴의 천재 수학자 존 폰 노이만이 조수직을 제의했지만 거절한다. 이듬해 튜링은 영국으로 돌아간다. 폰 노이만이 감탄한 이유는 논문에 나오는 '튜링기계'라는 개념때문이었다.
튜링은 수학자가 문제를 풀 때 일어나는 정신적 활동을 분석해볼 생각을 했다. 그 결과 사고에서 수학적 본질만을 추출한 '튜링기계'를 고안해 낸것이었다.
1939년 제 2차세계대전이 터지자 튜링은 영국 암호해독기관에서 독일 해군 암호의 최고 전문가로 활약했다. 튜링은 독일군의 '애니그마'라는 암호문 해독을 기계화하는 연구를 했다.
1941년 같은 팀의 수학자 조안 클라크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한다.
1942년 미국 암호부와 접촉하기 위해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 전자테크놀로지를 처음 접한다.

1943년 튜링과 수학자 맥스 뉴먼은 '콜로서스'를 개발했다(진공관 1500개를 사용한 암호문 해독전용의 세계최초의 전자계산기).
콜로서스는 독일의 암호를 해독했고,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정쟁은 컴퓨터 개발에 큰공헌을 했다. 많은 정보를 빨리 처리할 기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탄도계산을 위해 1945년 미국에서 만든 에니악(ENIAC)은 최초의 컴퓨터로 불리기한다, 그러나 빠르기는 하지만 진정한 컴퓨터라고 보긴 어려웠다. 다른 계산을 할 때마다 배선을 다시 해야했으니까.
에니악에 불만을 느낀 폰 노이만은 '에드백 설계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는 에드백에 내장 프로그램과 2진수를 도입하는데 튜링기계에서 힌트를 얻었다. 결국 오늘날 컴퓨터는 '튜링기계'의 개념을 구현한 '폰노이만 컴퓨터'인 셈이다. 튜링과 폰노이만이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 영국도 컴퓨터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에드백이 튜링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 것으로 영국에서 튜링은 점차 유명해지게 된다.
1945년 튜링은 국립물리연구소에서 컴퓨터 에이스를 만들기 시작한다. 결국 폰 노이만은 튜링의 개념으로 실제 컴퓨터를 구상했고, 튜링은 폰 노이만의 설계를 ACE 제작에 응용한 셈이다. 그러나 에이스 제작이 늦어지고 자신의 설계안이 밀리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48년 6월 21일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최초의 내장 프로그램 컴퓨터인 'SSEM'이 작동에 성공한다. 뒤늦게 맨체스터팀에 합류한 튜링은 SSEM을 기초로 1951년 출시된 컴퓨터 '페란티 마크1'의 프로그래밍 매뉴얼을 직접 쓴다. 한편 에드백은 개발 6년만인 1951년이 돼서야 가동하기 사작했다.
독창적인 사고를 지닌 튜링은 1950년 「계산게계와 지능」이란 논문을 발표한다. 1952년에는 '형태발생의 화학적 토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분야의 연구는 1970년 이후에나 본격화된다.
늘 아웃사이더였던 튜링은 어느날 동성앤애가 발각돼 풍기문란죄로 기소된다. 그 일로 튜링은 감옥형 또는 화학적 거세(여성호르몬주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튜링은 그 중 화학적 거세를 선택하게 되었다
냉전시절이었기에 암호전문가인 튜링은 영국 비밀요원으로부터 감시를 당했다.
그는 화학적 거세로 인하여 가슴이 나와 수치심에 시달린 나머지, 결국 1954년 6월 7일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자살하였다.




왼쪽의 사과마크는 독이든 사과를 먹고 자살한 앨런 튜닝을 푸모하기 위해 애플컴퓨터사의 창립자인 스티븐 잡스가 디자인한 애플컴퓨터회사로고입니다.

한편 계산기계협회(ACM)는 1966년부터 '튜링상'을 제정, 매년 최고의 컴퓨터과학자들에게 시상하고 있다.

인공지능 창시자 튜링
출판사 東文選
위의 책과 튜링의 소개홈페이지(http://www.turing.org.uk/turing/)을 참고하였습니다.

연대기로 본 튜링

1912년 6월 23일 런던에서 앨런 매시슨 튜링(Alan Mahison Turing)은 줄리어스 매시슨 튜링(Julius Mathison Turing)과 스토니(Stoney)에서 태어난 에설 사라(Ethel Sara)의 아들로 출생한다.

1912년~1921년 앨런과 그의 큰형인 존은 영국에 있는 접대 가정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들의 부모는 인도에 살고 있었는데, 인도에서 튜링의 부친은 식민지를 통치하는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튜링의 부모는 자녀들을 가끔씩 보기만 할 뿐이었다.

1926년 앨런 튜링은 셔본에 있는 퍼블릭 스쿨에 입학한다.

1930년 친구였던 크리스토퍼 모로콤(Christopher Morcom)이 죽다

1931년 수학연구를 위해 케임브리지에 있는 킹스 갈리지에 입학한다. (그의 조부 중 한 명이 복사가 되기 전에 수학자였다.)

1933년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고, 독일과 중앙유럽국가들의 지식인들이 망명길에 오른다.

1934년 보통보다 나은 성적으로 수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1935년 확률론 계산에서 한계중심정리에 관한 '학위 논문'을 한 후 킹스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이 된다.

1936년 D.힐베르트가 제시했던 결정 가능성(Entscheidung)의 부정적 결과를 증명해 보인다. 처치(A. Church)와 폰 노이만(J. von Neumann)과 함께 프린스턴대학으로 공부하러 간다.

1937년 《런던수학협회의사록》에서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할 문제에의 응용>을 출간한다. 프린스턴대학에서 프록터(Procter)장학금을 받아 낸다. 폰노이만은 다음해에도 프린스턴 대학에 머물것과 자신의 조교가 되어 줄 것을 제의한다.

1938년 영국으로 돌아와서 정부암호학교(Goverment Code and Cypher School;GCCS)에서 해독학 수업을 듣는다.

1939년 9월 4일 전쟁이 시작된다. 튜링은 블레칠리 파크()Bletchley Park)에 있는 GCCS부서에 들어간다. 그는 영국을 포위하고 있는 독일 해군의 무선 메시지를 해독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1941년 존 클라크(John Clarke)와 약혼하고, 곧 약혼을 파기하게 된다.

1942년 GCCS를 위한 수석 연구 자문위원이 된다. 미국의 암호부서와 접촉하기 위해 미ㅤㄱㅜㄲ으로 비밀리에 입국한다. 그리고 원자폭탄에 대한 많은 사항을 자문하게 된다.

1943년 1월부터 3월까지 벨(Bell)연규소에서 음성 해독 문제에 대해 작업한다. 이 곳에서 샤논(Shannon)을 만난다.

1944년 튜링은 음성 암호화 전자기 델리아(Deliah)Ⅰ에 대한 작업을 한다.

1945년 유럽에서 전쟁이 종료된다.
'두뇌를 구축한다'는 그의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컴퓨터의 자동 계산 기계(Automatic Computing Engine; ACE)를 구축하기 위해 테딩턴에 있는 국립물리연구소(NPL)에 들어간다.

1947년 이론적이고 행정적인 이유로 NPL을 떠나게 된다. 1년 예정으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다시 돌아온다. 생리학과 신경과학수업을 수강한다.

1948년 6월에 실용화될 컴퓨터의 원형에 대한 작업을 하기 위해 맨체스터대학의 정보과학 팀에 들어간다.

1950년 철학지《정신 Mind》에 <계산기와 지능>이란 논문을 게재한다.

1951년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특별회원으로 선출된다. 동성연애로 인해 소송을 받고 형을 집행받는다. 감옥과 화학적 거세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1952년 《왕립학회 회보》에 그의 논문 <형태 발생의 화학적 토대>를게재한다. 엽서(葉序)연구를 한다. 10월:(융식의) 정신 분석학적 치료법을 받기 시작한다.

1953년 크릭(Crick)과 왓슨(Watson)은 DNA구조를 발견한다. 2~3월 : 호르몬 처방을 박게 된다.

1954년 튜링은 약간의 시안화물에 담가 놓았던 사과를 먹음으로써 (맨체스터에서 가까운) 윔슬로우(Wimslow)에 있는 자택에서 6월 7일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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