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위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Tuesday, 28 December 2004
지난 봄에 나왔던 JP 선배의 '이공계 위기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제언'의 속편
딴지일보와 한겨례신문에 올라왔길래 옮겨본다.
기초학문에 연간 3조를 내다버리자는 주장에 원츄를 날리며~~
어느 물리학자가 보는 이공계 위기의 본질②
0. 들어가며
이 글은 지난 봄에 썼던 “이공계 위기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제언”의 후속글입니다. 전편만한 속편은 없다지만, 그 때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어떻게든 다시 정리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공계 문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사회가 맞부딪히고 있는 여러 가지 갈등과 문제들이 또한 이공계 위기 문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 사회의 총체적인 난맥상이 그 사회의 학계나, 혹은 기초학문 분야에 그대로 투영될 것이기 때문에 저의 이런 생각은 지극히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소간 저의 정치적인 견해가 어떤 형태로든지 이 글에 반영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리 밝혀 두자면, 저의 정치적인 성향은 민주노동당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편입니다.
제 일천한 경험은 서울대 물리학과에서의 11년, 연세대 물리학과에서의 3년 8개월 생활이 전부라서 항상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대한 걱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껏해야 3류 물리학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다는 점 또한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뒤에서 밝힐 여러 가지 견해들은 이런 저의 처지의 산물일 수밖에 없겠지요.
편의상 높임말을 쓰지 않게 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몇 가지 오해들
먼저 이공계 위기와 관련해서 논란이 있는 몇 가지 의견들을 재고해 보자.
1) 시장원리를 도입하라?
이공계 위기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나온 얘기 중 하나가 바로 이공계에 시장의 원리를 도입하든지 아니면 제대로 작동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놈의 “시장원리”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를 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경제학에 문외한이라 시장원리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대략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내용들을 요약해 보자면,
시장주의 = 자유경쟁 = 보이지 않는 손 = 비교우위 = 능력에 따른 댓가 지불
등 이 아닐까 싶다. 나는 특히 이공계인들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왜 그런가? 내가 보기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만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는 주먹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케인즈가 나타나서 국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역설하여 뉴딜정책을 성공시킨 게 벌써 반세기도 훨씬 전의 일이다.
더군다나, 세상은 그리 공정하지가 않다. 자유무역의 전도사인 미국만 봐도 그렇다. 한국과 일본 및 유럽산 철강재에 반덤핑 과세를 매겨서 자유무역의 정신을 훼손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석유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는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믿음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소니의 기술력은 일본 내 중소기업을 등쳐먹으면서 축적된 것들이다. 그대들이 좋은 기술을 가지고서 그대의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고 해서 사장님이 그대들에게 더 많은 월급을 주어야 할 절대적인 이유는 없다.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기본 원리는 시장주의라기보다는 자본의 논리이다. 시장의 원리가 지켜지는 것은 자본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그런 구조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사장님 입장에서야 싼 값에 고급 기술을 충분히 써 먹을 수가 있는데 왜 당신들에게 더 많은 댓가를 지불하겠나. 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좌파적인” 투정이 아닌가. 혹여 이런 자본의 논리마저 부당하고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그대들은 칼 맑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공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시장의 원리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서 한참 빗나가 있다. 왜 이공계 인력이 싸구려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그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이윤을 최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상과제이기 때문에 여타의 제반 비용은 최대한으로 줄여야 한다. 연구원이나 엔지니어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이공계 인력의 전직 제한법은 그 비용을 줄이기 위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겠는가.
물론, 우리는 잘나가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바라보면서 이게 결국 사장님들에게도 궁극적으로는 큰 이득이 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잘 안다. 아마 사장님들도 다 알 것이다. 기술개발 안하면 안 된다는 것, 고급 인력에 후한 대접을 해 줘야 끝내 살아 남는다는 것 말이다. 적어도 경영에 관한 한, 그들은 여러분들보다 훨씬 전문가이다. 그래서 문제는 개별 회사의 사장님이나 간부들의 인식의 문제이기에 앞서서 전체적인 구조에 대한 문제, 다소 천민적인 자본축적 구조의 문제이다.
시장의 원리는 이미 작동하고 있다. 그게 (거대) 자본의 논리에만 충실한 게 문제라면 문제다. 합리적이고 새로운 구조를 위해서라면, 국가가 나서서 때로는 자본의 논리를 오히려 ‘거스르는’ 정책을 펴도록 주문해야 할 처지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는 그런 시장은 세상에 없다.
2) 이공계인의 공급과잉이 문제인가?
표면적으로 보자면 넘쳐나는 이공계 출신들에 의한 공급 과잉과 뒤이은 가격 하락이 맞는 얘기다.
“우리나라 24세 연령자의 이공계 학사학위 취득비율은 8.9%로, 중국 0.9, 일본 7.2, 싱가포르 7.8, 대만 6.7, 독일 8.1, 미국 5.4 보다 높다. ”- [기초연구 중장기 계획 요약 보고서]
“자연과학분야에서도 우리 나라가 불필요하게 많은 학사를 배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리학에 있어서 한국은 2,005명의 물리학사를 배출하고 있는데 우리보다 인구가 거의 6배인 미국은 3,679명으로 우리보다 1.83배만을 졸업시키고 있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수요공급원칙을 무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계산학을 제외하면 한국이 19,356명 일본이 18,489명으로 인구가 훨씬 적은 한국이 일본보다도 많은 이학사를 사회에 내보내고 있다.“ -[제10회 대학교육 정책 포럼: 국가인적 자원 개발을 위한 학문의 균형적 발전 방안]
이 상황이 우리에겐 참으로 답답하지만 기업들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상태 그대로 두는 것. 그러면, 정말 그놈의 보이지 않는 손이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이미 이공계 기피와 그에 따른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으니까.
또 다른 방법은 각 주체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상향 안정화”하는 것이다. 지난 번 글에서도 잠시 밝혔듯이, 값싼 노동력으로 물건 팔아 먹던 시절은 이미 옛날 얘기다. 이왕에 비싼 값을 치를 양이면 제 값어치를 하는 “상품”을 제대로 구매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다. 기업이나 엔지니어나 정부나 다같이 저질 싸구려로 놀던 시절은 이제 마감하고 모두가 고급화의 길로 가야 한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이공계생들이 대학에서 매년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핵심연구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BT 핵심분야인 '인간유전체' 분야에서 국내 인력은 미국의 5%, 일본의 10% 수준에 불과하다.” - [기초연구 중장기 계획 요약 보고서]
놀랍게도 분야에 따라서는 학사출신이 미국이나 일본보다 절대적인 숫자에서 앞서기도 하지만, 박사급 배출인력 숫자는 거의 모든 분야를 불문하고 대략 10:1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한 가지 재밌는 통계를 보자면,
“철학의 나라 독일이 철학사(Magister)를 410명, 철학교육학사를 302명 배출시키는데 비하여 우리 나라는 철학사 1,467명을 졸업시키고 있는 점이다.” -[제10회 대학교육 정책 포럼: 국가인적 자원 개발을 위한 학문의 균형적 발전 방안]
그러나 같은 자료에서 철학박사 숫자는 한국 41, 독일 265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시나 우리 나라에서는 적당히 싸구려 인력들만 대량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기업에서 값싸게 데려갈 수 있는 중급의 인력들은 매우 풍부한 편이다. 이런 공급과잉이 일정정도 지금의 이공계 위기를 야기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중급 인력들이 고급인력으로 양성되는 통로는 매우 협소하다. 대부분이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공계 위기의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닌 질의 문제이며, 단순한 공급과잉의 문제라기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한 전문 고급인력과의 균형의 문제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처우를 개선해 달라?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은 이공계 위기와 관련된 거의 모든 글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말들이 그냥 내던져지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공허한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처우개선의 문제를 보자.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처우개선의 주체와 방식이다. 누가 이공계인들의 처우를 개선해 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그냥 후렴구처럼 처우개선을 들먹이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회사 사장님이 어느 날 갑자기 회사 내 엔지니어들의 기여도에 감복하여 월급이라도 당장 올려 줄까. 아니면 정부에서 이공계 학사 졸업장 가진 사람들에게 연금이라도 지급해 줘야 하는 건가.
처우개선의 관점으로 문제를 보기 시작하면 사장님이나 정책 결정권자들의 개인적 성향에 이공계의 미래를 맡기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의 고민은 그들이 우리의 처우를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사장님이나 정부 고위 관료가 우리의 처우를 개선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사회 구조, 내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한다.
나의 요지는 이공계의 문제를 단순히 표피적이고 현상론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전체의 학문의 문제, 지식 생산의 위기의 문제, 그리고 고급 연구 인력의 부족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번 글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좀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어설픈 중급의 인력들이 다양한 고급인력으로의 진입 통로를 확보하게 되면 상황이 훨씬 달라질 것이다.
나라에서 많은 연구소 지어서 그 많은 공학자들, 과학자들 흡수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공계에 진학한 학생들 중에는 물론 좋은 회사 취직하거나 사업을 벌이는 것이 목표인 경우도 있겠지만, 순수한 공학적 열정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정열만으로 이 길을 택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돈이 아니다. 단지 자기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만 마련되면 된다. 나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입자물리학에 대한 애정과 나름대로의 열정이 나나 내 주위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공돌이”들에게 왜 그런 가슴 뜨거운 열정이 없으랴. 이런 공학도들이, 아톰을 꿈꾸며 우주 왕복선을 꿈꾸며 신소재 혁명을 꿈꾸는 그런 공학도들이 정말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연구를 맘껏 할 수 있는 그런 연구 공간이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기업에서나 정부에서 이런 공학자들 모셔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해야 함이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이공계 문제의 본질을 학문의 위기로 파악하는 것이 결코 원론적이거나 이상적이거나 혹은 멀리 에둘러 가는 게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면서 확실한 방안에 이르게 하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도 마찬가지이다. 애매한 보통 사람들보고 인식을 좀 바꾸라고 할 게 아니다. 그런 사람들의 보통의 인식과 보통의 상식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수의 의식이 바뀌는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부 고위 관료들의 인식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 인식의 변화를 말하고 싶으면 이 양반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 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서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그렇게 실물화된 변화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흔히 말하는 사회적인 인식은 바뀌기 힘들다.
요컨대, 이공계인들이 이 위기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이런저런 주장을 펼칠 때에 우리의 정책적 목표와 대상이 매우 분명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공계 내에서조차 뭔가 합의되거나 통일된 의견의 흐름이 아직 없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인문사회계열 출신들이 이공계를 잘 몰라서 문제이듯이, 우리 또한 한 사회나 국가가 돌아가는 원리를 잘 모르고서 막연하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몇 가지 오해들보다도 내가 이번에 심각하게 제기하고 싶은 한 가지 중요한 “오해”가 있다.
2. 좌파적 평등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
- 평등주의인가 경쟁주의인가?
내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나라 물리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될 성 싶은 한두 명에게 집중해서 지원해야지 나머지 떨거지들에게까지 제한된 자원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에서는 한 명의 천재만 의미 있을 뿐 나머지 백 명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사실 이 바닥에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이런 상식은 꽤나 뿌리가 깊어서 지금 진행 중인 두뇌한국21(BK21) 사업이나 최근 제기되고 있는 최고 과학자 선정 사업 등이 모두 이런 엘리트주의와 관련이 있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이른바 “평등주의”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면서, 학계에서의 조그만 논란거리가 사회 전반적인 이슈들과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 평등주의와 관련된 논의의 근저에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이공계의 문제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지금부터 하나하나 따져보자.
1) 왜곡된 대립구도, “평등주의냐 경쟁주의냐”
평등이라는 말에는 대개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평등에 대한 정확한 사회과학적 의미를 잘 모르는 필자를 용서하기 바란다.) 하나는 “형식적” 혹은 “기계적 의미의 평등”으로서 법 앞의 만인의 평등이나 기회의 균등, 프랑스 대혁명 때 외쳐졌던 평등 등이 여기 해당한다. 대체로 인간의 천부인권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또 하나는 “실질적 평등”으로서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를 이른다. 열 시간 일한 사람이 한 시간 일한 사람보다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이 대체로 지금의 상식적인 사회 정의에 부합한다. 따라서 실질적 평등을 좀 다른 말로 ‘경쟁주의’라고 하더라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부족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이런 의미구분을 해 본 것은 최근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평등주의와 관련된 논란이 다소 엉뚱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평등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형식적 평등의 확대가 실질적 평등, 즉 경쟁주의를 아예 부정하거나 혹은 위축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고교 평준화(=형식적 평등) 때문에 고등학생들의 성적이 하향 평준화되었다든지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 구축 같은 복지정책 때문에 성장 잠재력이 위축된다든지 하는 주장들이 모두 이런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학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최근 확대되는 지방대학 지원에 대해 서울대 등 상위권 대학들은 대학의 경쟁력 약화를 우려한다. 어느 유력 일간지는 하버드가 옥스퍼드를 제친 이유는 바로 경쟁주의 때문이라는 기사를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이 모든 논의는 결국 평등주의냐 경쟁주의냐 하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예각화되며 우리들에게 양자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이런 대립구도를 제기하는 언론이나 집단의 어떤 불순한 정치적 의도, 예컨대 “평등주의=기계적 평등=공산주의=북한의 배급제=좌파정권=빨갱이=···”라는 우리 사회의 파블로프적 연상 작용의 악용 같은 의도도 많이 개입되었다는 혐의가 짙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나는 평등주의와 경쟁주의의 이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굉장히 왜곡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 경쟁주의가 진정한 경쟁을 의미하려면 우선 기회의 균등이라는 형식적 평등이 항상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과외비 천만 원 쓰는 학생과 십만 원 쓰는 학생의 성적차이가 그들의 능력의 차이, 경쟁력의 차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반론을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정권은 형식적 평등의 전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경쟁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평등주의와 경쟁주의의 대립구도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물음을 피할 수가 없다.
첫째, 우리 사회의 형식적 평등 혹은 기회균등은 충분히 실현되고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형식적 평등의 확대가 경쟁의 부정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둘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이 형식적 평등의 과잉에 의한 경쟁의 상실 때문인가, 아니면 소수의 기회독점에 의한 공정한 경쟁의 부재 때문인가?
2) 형식적 평등은 이루어졌는가?
얼마 전 국정감사에서 한 국회의원이 어느 고등법원장에게 “대한민국의 법은 만인에게 평등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매우 부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불법 정치자금으로 재판받은 국회의원에 대한 감형의 사유가 “3선 의원으로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는 점이라고 하니 사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다 나온 거나 마찬가지다. 사회 정의의 최후의 보루라는 사법부 스스로가 “법 앞의 만 명만의 평등”을 시인한 셈이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의 불평등의 문제, 기회 불균등의 문제 중 상당수는 아마 서울대를 빼고서 얘기하기가 힘들 것이다. 내가 이 점을 뼈저리게 실감한 것은 약 4년 전에 서울대에서 연세대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다음은 2001년 3월 기준으로 서울대 물리학과와 연세대 물리학과를 대략적으로 비교한 것이다. 당시 필자의 기억과 인상들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대한민국 랭킹 1, 2위 대학 물리학과의 차이가 이 정도면 지방대 물리학과의 상황을 상상하기가 참으로 끔찍하다. 이 상황을 놓고서 상반된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서울대와 연세대의 실적이나 연구 결과의 차이 때문에 이런 환경의 차이가 생겼느냐 아니면 애초의 부당한 환경 차이 때문에 실적과 결과의 차이가 생기느냐.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설령 아무리 형편없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기관이라 할지라도 정상적인 연구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이런 “넘버2”를 국가나 사회가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와 연세대의 경쟁이 정말 공정하고 의미 있는 경쟁일까. 약 4년이 지난 지금도 연세대 물리학과의 이메일 서버는 조교 학생이 관리한다. 만약 국가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연세대 물리학과에 전문 관리자를 붙여주고 별도의 전산실 공간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그게 경쟁의 포기일까. 아닐 것이다. 아마도 공정한 경쟁을 위한 최소한의 여건 마련이라고 다들 이해해 줄 것이다. 특히나, 사립대의 등록금 의존도가 무려 80% (미국 38.7%, 일본 60.3% ; 나라정책연구회, 1995)에 달하는 한국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형식적 평등과 관련된 우리 나라의 많은 문제들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권세가의 자제들은 갖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군대에도 안 간다. 돈 많이 버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금을 적게 내고 심지어 탈세를 일삼아도 처벌받지 않는다. 힘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금방 용서가 된다. 전두환은 여전히 황제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지난한 민주화의 과정은 사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불평등의 해소, 최소한의 기본권과 기회균등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 머리 모양에서 복장에 이르기까지, 아니 우리 머리 속의 생각 하나하나까지 감시받고 처벌받던 게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87년이 되어서야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다시 뽑게 되었고 파업중인 노동자가 변호사의 도움을 합법적으로 받게 된 것도 97년의 일이다. 호남차별의 상처는 아직도 완치의 길이 요원하다. 우리는 실상 “평등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 시절 우리 사회는 경기고와 서울대와 경상도와 혹은 육사를 나온 사람들이 점령한 그들만의 왕국이 아니었던가.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아야만 했던가.
공교롭게도 그 때 권력의 핵심을 이루던 사람들이 지금 “평등의 과잉”을 외치고 있다. “고려대 나오고도 정치부 기자를 할 수 있느냐”는 말이 여전히 상식으로 통하는 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런 “신분제”가 헌법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고 있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 대통령이 상고 출신이라는 게 비난의 이유가 되고, 같은 민주화 운동을 했으면서도 지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이유가 되고, “부산고만 나왔어도···” 고향에서 왕따 당하지 않을 이유가 되는, 그래도 “나랏님”은 번듯한 고등학교와 명문대학을 나와야만 하고 그런 높으신 분들에 의해, 고려대 나와서는 정치부 기자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그런 높으신 분들에 의해 진급이 막히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 관습법의 나라에서 다행히도 기회균등과 형식적 평등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예컨대 BK21사업은 서울대에 돈을 몰아주자는 애초의 취지에서 한참 벗어나 어정쩡한 나눠먹기가 되었으니 ‘좌파적 평등주의’에 근접한 실패한 사례가 될 법도 하다. 그렇게 또 몰아 준 결과가 어떠했을지 알 수가 없으니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번 사업을 통해 주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성균관대처럼 기회만 주어지면 뭔가 일을 낼 수 있는 역량을 새롭게 발굴해 내는 기쁨을 맛보지는 못했으리라. 아니, 서울대도 ‘경쟁’하지 않으면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교훈이 가장 큰 성과가 아닐는지.
3) 기득권에 의한 기회독점이 가장 큰 문제
정작 우리 사회에서 고질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잠시 돌아볼 때 형식적인 평등의 과잉이 경쟁을 질곡하는 단계는 아무래도 아직 아닌 것 같다. 우리가 그런 감격적인(!) 상황을 언제 한 번 겪어 보기라도 했던가. 오히려 내 생각엔 그 반대가 문제다. 즉, 공정한 경쟁을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기회의 균등, 형식적 평등이 아직까지도 전면적으로 실현되지 않아 소수의 기득권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불공정한 경쟁” 구도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다. 그들은 평등의 과잉을 내세워 경쟁의 부재를 비난하지만 실상은 그들만이 기회를 독점함으로써 기득권 내에서의 경쟁에서 스스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경쟁주의의 가장 큰 적은 바로 평등주의를 배격함으로써 진정한 공정경쟁을 가로막는 그런 사람들이다.
평등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정한 경쟁을 반대하지 않는다. 전교조에서 고교 평준화를 고수하는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의 실현을 위함이다. 나라 경쟁력이 추락하는 것은 평준화로 인한 고등학생들의 실력저하 때문이 아니라 (고등학생들이 공부 좀 못한다고 해서 그게 곧바로 한 나라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지 않는다)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상위권 대학에 진입한 “기득권”이 더 이상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바라는 것은 어린 학생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대학에서 정말 공정한 경쟁을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회를 독점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그로 인한 경쟁력 상실의 책임을 오히려 기회균등의 확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다. 고교 등급제와 관련된 논란의 와중에서 한국 교육의 모든 문제를 일선 고등학교의 부실한 내신관리 탓으로, 혹은 전교조 탓으로 몰아 세운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그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만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통해 기득권이 기회를 독점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재생산된다. 일부 유명 사립대의 고교 등급제도 이런 시도의 일환이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권력세습은 용서되지 않지만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삼성그룹 세습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권력과 학벌과 기득권은 고스란히 “세습”된다.
경쟁주의자들은 항상 이렇게 주장한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잘하는 몇몇에게 집중해야 살아남지 않겠나? 다소간 불공정한 면이 없잖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 ‘잘하는 몇몇’이 정말 잘하는지, 누구나 납득할만한 과정을 거쳐 인정된 몇몇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게다가, 이런 방식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긴급처방이다. 소득 1만 달러까지는 이렇게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은 힘들다. 선진국이 되기 위한 핵심 키워드는 투명성과 공정성이다. 신분제에 버금가는 자폐적인 기득권과 그들에게 집중된 기회, 그리고 이 구조의 폐쇄적인 재생산은 확실히 이런 키워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 사회 기득권이 모든 기회를 독점하며, 스스로의 경쟁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임무를 방기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밝을 수가 없다.
3. 진정 자유경쟁을 원한다면
평등주의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평등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경쟁의 원리를 부정한다고 주장하지만, 기실 누가 과연 진정한 자유경쟁을 외면하는가를 따져 보면 상황은 정반대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하는 서울대부터 먼저 살펴 볼까.
서울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넘버원. 데모하다 잡혀가도 서울대생이라면 전경들한테 덜 맞았던 “특혜”도 누려 봤지만 다음 숫자들 보면 정말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학교수의 27.7%, 국회의원의 37.4%, 100대 기업 대표이사의 43.7%, 검사장급의 75.6%, 노무현 정부 첫 개각 때 장관의 57.9%, 청와대 수석비서관의 92.3%, 1급 국가공무원의 48.2%, 장차관의 63.2% (한겨레 신문).
그런데도 세계 속의 서울대는 정말 비참하다. 중국 상하이 자오퉁 대학 평가 153~201위, 영국 더 타임스 지 선정 119위. 아무리 국가별이 아닌 대학별 랭킹이라지만, 우리 나라에서 1등 먹는 것 중에서 세계랭킹이 이렇게 형편없는 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반도체 메모리 1위, 휴대폰 판매 3위, 외환 보유고 4위, 자동차 생산 6위, GDP 11위. 그렇게 욕 먹으면서 죽을 쑤고 있는 축구 대표팀 피파 랭킹이 이번 달 기준으로 24위다. 피파 랭킹이 아마 50위 밖으로 밀려났다면 광화문에 붉은 악마가 한 5만은 모여서 집회라도 했을 거다.
여러분들이나 나나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왜?
여기서 한가지만은 분명히 하자. 서울대가 이렇게 세계 속의 형편없는 대학이 된 것은 결코 학생들 탓이 아니라는 점이다.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 중에서는 고교 평준화가 학생들의 실력을 하향 평준화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대학에서 정상적인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학생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어떤 주장도 단호히 배격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학의 근원적인 기능이 바로 인재양성이기 때문이다. 정말 훌륭한 대학이라면 좀 못하는 학생들 데려다가 세계적인 인재로 길러내야 한다. 세계적으로 능력 있는 학생들 데려다가 세계적인 인재로 못 키우는 바보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서울대가 자신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고등학교 갓 졸업한 입학생들에게 뒤집어 씌우지 마라. 또 다른 이유는, 정말 뛰어난 학생들 입학했을 때 과연 서울대 랭킹이 100위 안에라도 들었나 하는 의문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적 없다.
흔히 천재들 데려다가 바보 만드는 곳이 서울대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 나라 고등학생들, 요즘 학습능력이 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세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들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고등학생들 성적이 좀 안 좋다고 그걸 곧바로 대학과 국가의 경쟁력 저하로까지 비화시키는 건 지나친 처사이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대학이라는 건 왜 만들었단 말인지. 이런 논리라면 미국은 아마 후진국을 면치 못할 게다. 언론 등에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얘기들 쏟아내면 점잖은 교수님들 나와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바로 잡아줄 만도 한데 오히려 총장님 하시는 말씀이 “고교 등급제를 도입하는 사립대학의 고충을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고매한 교수님들께서 자기 책임을 먼저 통감하기 전에 애꿎은 학생들한테 터무니없는 짐을 지우는 건 아무리 좋게 봐 줘도 “파렴치”의 수준을 넘지 않는 것 같다.
한 집단에 뭔가 큰 문제가 생기면 어찌 되었든 그 집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게 공평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체로 힘 있는 사람들이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킨다. 서울대 문제도 마찬가지다. 서울대가 경쟁력이 없는 이유는 학생들의 학습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서울대 자체의 경쟁력이 뒤떨어진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예컨대, 대학 평가의 주요 기준 중의 하나가 교수당 논문 편수나 인용횟수이다. 학생당 논문 편수가 아니란 말이다.
1996~2000년간 과학기술분야 발표 논문수를 보면 (과학기술부, “과학기술분야 연구실적 분석 연구”) 서울대의 전체 과학기술분야 논문 수는 2,202편으로 세계 55위권. 1위 하버드의 37,932에 비해 약 1/17 수준이다. 1인당 편수는 5.9편으로 하바드의 18.7편은 물론 카이스트 20.6편, 포항공대 13.3편보다 현저히 낮다.
물론, 교수님들도 억울한 면은 있을 것이다. 서울대의 학생 1인당 장서 수는 63.4권으로, 하버드의 694.1권에 비교도 되지 않으며, 우리나라 교수 1인당 학생수(30명)는 미국(15명)의 두 배라는 현실을 고려해야 하니까. 그러나 이런 열악한 현실 개선의 일차적 책임 또한 서울대 교수들에게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 자명하고 명백한 사실을 두고 엉뚱한 곳에서 서울대 119위의 이유를 찾으려고 해서야 말이 되나.
여기서 우리는 서울대 스스로가 얼마나 내부의 치열한 상호경쟁을 통해 전체적인 대학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지 심각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이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른바 “경쟁주의자들”이 단 한번도 서울대 자체의 경쟁력을 의문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누차 얘기했던 대로 그들은 기득권의 상호경쟁을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경쟁주의자들의 “평등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정작 나라가 망해가는 이유는 사회의 중추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경쟁력을 진작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서울대 문제를 가장 일선에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바로 서울대 교수들이라는 점에서 이 집단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경쟁주의”를 논하기 어렵다.
서울대라는 구조를 교수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조로, 그래서 정말 실력있는 사람들만 살아 남을 수 있는 구조로,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경쟁”이 실현되는 대학으로 만드는 데에 서울대 교수들이 얼마나 열과 성을 다했는가.
단적으로 서울대 미대의 김민수 전 교수 예를 들 수 있다. 서울대 미대 교수님들 중에서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 있다고 단지 재인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행정소송에서 이기고도 아직 복직이 되지 않고 있다. 서울대에서조차 실력이나 능력, 업적이 평가의 기준이 아니라는 점은 불행하게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경쟁은 이미 공정하지가 않다. 실력자의 비위를 얼마나 잘 맞추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서울대의 “나태함”은 신입생 선발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난 수년간 정부에서 준비한 수많은 교육개혁 조치들은 사실상 서울대가 거부함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말도 많았던 이해찬 교육개혁안을 예로 들어 보자. 이해찬 개혁안은 교육 전반에 걸친 방대한 개혁 청사진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중에서 대학입시와 관련된 부분이 그 유명한 “한 가지만 잘 하면 대학 갈 수 있다”는 제안이다. 이것은 곧 수능의 자격시험화와 대학의 입시 전형 다양화를 의미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대학입시는 당연히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키고 사교육비를 줄이며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을 여러 각도로 평가하여 숨겨진 재능을 대학이 발굴 육성한다는 취지니까 왜 아니 좋은 생각이랴. 뜻있는 교육 관계자들이 기대를 가졌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곧 엄청난 반대에 부딪힌다. 개혁안으로 가장 손해를 보는 곳은 어디일까. 당연히 서울대이다. 서울대는 입학시험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아주 쉽게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다. 왜냐? 성적순으로 줄세워서 들여 보내면 되니까. 입시 전형이 다양화된다는 것은 대학이 스스로가 학생들을 평가할 여러 가지 기준들과 방식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당연히 바람직한 일이다. 시험 못 보고 공부 좀 못해도 얼마든지 뛰어난 학생들 즐비하다. 이들의 개성 있는 능력들과 잠재력을 끄집어 내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을 대학이 아니면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누가 만들어 낸단 말인가? 서울대는 이게 하기 싫었던 게다. 사실 서울대가 자신에게 부여된 이런 중차대한 임무를 방기했다는 점만으로도 자기반성할 이유는 충분하다. 왜 싫었을까. 이것은 ‘귀차니즘’의 문제를 넘어선다.
우리 나라에서 똑똑함 혹은 유능함의 기준은 서울대 가느냐 마느냐에 의해 일차적으로 결정된다. 그것은 곧 서울대가 우리 사회의 법이요, 정의요, 진리라는 말로 확대된다. 서울대는 서울대가 인정하지 않는 “뛰어남”이 두려운 것이다. 입시 전형이 다양화되면 서울대가 지금까지 제시해 온 똑똑함의 기준이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고 서울대가 제시하지 않는 새로운 똑똑함의 기준, 능력 있음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각 대학들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것이다. 이것은 서울대에게는 재앙이다.
얼마 전에 TV를 보니까 공부는 별로 못하는데도 벌써 축구와 관련된 책을 써 낸 고등학생이 있었다. 축구 전문가들도 이 학생의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이해찬 개혁안이 지금 시행되고 있다면 이 친구는 서울대보다 집에서 가깝고 4년 학비에 장학금에 유학까지 보장해 주는 지방의 모 사립대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느 누구도 이 학생이 서울대 학생들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야 “니가 아무리 축구 전문가래봐야 수능 점수 낮아서 서울대 못 온 주제에···”라고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이 학생은 아마 자격 시험 정도의 수능을 가뿐하게 통과했을 테니까 수능 점수만 놓고 본다면 서울대생과 다를 바가 없다. 예전처럼 학생들의 능력을 숫자로만 매겨버리는 수능점수라는 게 의미가 없어진다. 여기서 서울대의 혼란이 발생한다. 과연 서울대생은 국내 최고의 학생들인가.
학생들의 능력을 다양하게 평가하면 수능점수라는 하나의 획일적인 기준이 일종의 권력 노릇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선발 기준의 다양화는 곧 권력의 분산을 의미한다.
우리 나라의 특성상 서울대가 거부하면 교육개혁과 관련된 백약이 무효다. 당장 그 해 입시가 끝나자마자 “수능이 너무 쉬워 변별력을 잃었다”는 주장이 서울대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조선일보는 연일 관련 기사를 대서특필하며 이해찬식 교육개혁이 학생들을 바보로 만들었다고 퍼부었다. 조선일보 기자의 60%가 서울대 출신이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서울대와 조선일보는 우리 나라의 교육 개혁보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지켜왔던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 더 혈안이 되어 있다. “쉬운 수능”으로 인한 “바보”가 정말 한국 교육개혁의 첫걸음임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권력 해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그 이후에도 줄곧, 지금까지도 쉬운 수능을 거부해 왔다.
이런 식으로 우수한 학생들 싹쓸이 해 놓고서는 이것을 무기로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기회와 재화와 혜택을 독점해 왔다. 서울대와 조선일보는 주장한다. 쉬운 수능으로 학생들 간의 경쟁이 없어지고 그 결과로 능력이 저하되고 그런 학생들을 대학이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많이 뽑으면 대학이 곧 죽는다고. 그러나 임종을 맞이하는 것은 대학이 아니라 서울대의 권위이고 서울대의 독점이며 우수한 학생 데려 오는 것만으로 자신의 임무를 한정하는 서울대의 안일함, 서울대의 폐쇄성이다. 반대로, 점수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절대 다수의 학생들에게는 더 넓어진 선택의 폭과 기회의 향상,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의미한다. 서울대와 조선일보는 경쟁을 말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경쟁하지 않는다.
서울대가 정말 세계적인 대학이 되려면 최고 학생들 손쉽게 데려올 궁리만 하지 말고 첫째로 교수들 사이의 완벽한 경쟁체제를 도입하고 둘째로 좀 모자라는 학생들도 그런 교수들 밑에서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숨겨진 재능이 빛을 볼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한편, 대학 자율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연세대와 고려대가 역설적이게도 이런 서울대와 조선일보의 개혁안 거부에 장단을 맞춘 것은 적어도 지금의 지위를 그대로 확보하겠다는 계산의 결과다. 연세대가 서울대에 비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앞서 각 학교 물리학과를 비교함으로써 그 일단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세대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또 하나의 기득권의 축을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고교 간 실력차 운운하면서 강남권 학생들만 가려 뽑으며 “평등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할 만큼 연세대는 스스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연세대는 타임스 조사 결과 등수에도 없다. 사립대는 돈이 없다고 늘 투정하면서도 “NBA 동문 하나 만들자”는 모토 아래 스카우트비만 10억대라고 하는 하승진 선수 데려 오기 위해 사상 유래없는 파격적인 조건들로 총력전을 기울였다. 내가 있는 연구실(약 15명 규모) 모니터가 볼록한 브라운관에서 LCD로 바뀌는 데에는 무려 3년 반이 걸렸다. 아무리 사립대가 돈이 없다고 해도 연세대는 적어도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누가 믿겠나. 다른 사립대학은 다 문 닫아야 한다. 등록금은 물론 국내 최고 수준이다. 새로 지은 세브란스 병원은 연건평 기준으로 63빌딩을 능가한다고 들었다. 연세우유사업도 있고, 날씨 좋은 주말이면 노천극장에서 대규모 공연이 심심찮게 열린다. 토요일도 늦게까지 연구할라치면 내가 대학에 와 있는지 공연장에 와 있는지 구분이 안 가지만, 그래도 없는 대학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니 이해해 주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신입생들한테 교묘하게 학교 발전기금 걷으려다가 들통나서 거센 반발을 받기도 했다.
나는 연세대로 오고 나서 정말 사립대의 비참한 상황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차라리 기여 입학제 이런 거라도 허용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연세대에서 기여입학제를 추진한 2001년 한해에만 무려 408억 원이라는 기록적인 기부금을 거둬 들였다. 그래도 돈이 모자란다면, 떳떳하게 회계를 공개하든지. 한 학기에 수백만 원의 등록금을 내는 학생들이라면 자기 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최소한의 알 권리는 있다. 모든 사립대가 재단 회계를 공개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1등 사립대라면 이 문제에 대해 이제는 전향적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교육기관이라기보다 학생들 등쳐먹는 장사치”라는 일부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도 있을 테니까.
교수들이 경쟁할 수 있는 체제 역시 여기도 없다. 얼마 전 독문과에서는 교수 임용과정에서의 불공정함과 연구비 유용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교 평준화가 나라를 망친다지만, 정작 대학 내부는 너무나 ‘평등’하다. 서울대와 연세대 물리학과가 그렇게 기막힌 차이를 보이는 데에는, 물론 기본적으로 서울대의 독점 구조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연세대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마인드에도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순전히 공정한 경쟁의 측면에서 보자면, 연세대 교수들의 국내 최고의 연봉도 그 잘난 ‘경쟁주의’를 거스르고 있다. 2003년 정기국회 교육인적자원부 보고 자료에 의하면 정교수 10년차의 연봉이 약 1억500만원이다. 우리나라에서 연봉 1억의 의미는 남다르다. 정교수 10년이면 대략 50대 중후반인데, 그때부터 정년까지 아무 걱정없이 매년 1억 이상 받는다는 얘기다. 참고로, 중국 상하이 자오퉁 대학이 평가한 연세대 세계 랭킹은 202~301위이다. 일선 고등학교에서의 터무니없는 내신 산출과 조작을 탓하기 전에 연세대 내부의 ‘내신’은 잘 챙기고 있는지, 실적에 따라 교수 연봉 재조정하는 진정한 경쟁주의의 성의를 먼저 보이는 건 어떨지부터 먼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연세대의 고교 등급제를 옹호하며 열렬히 평등주의를 비판하고 경쟁주의를 외쳐댄 곳이 바로 조선일보다. 조선일보와 연세대는 연세대 재단 이사장 방우영(전 조선일보 사장)에서 그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뭐 어차피 재단 이사장은 얼굴 마담 아니냐는 일부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하고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하는 우리네 “관습적” 정서에는 뭔가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이겠지만, 지난 김대중 정부 말기에 언론사 세무조사가 한창일 때 유독 연세대 교수들이 조선일보에 방패막이 투고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며칠 뒤 ‘언론자유’를 위한 거룩한 성전을 펼치던 조선일보가 느닷없이 “세브란스 특집” 기사를 무려 두 면에 걸쳐 게재한 적이 있었다 (세브란스는 연대 의대 부속병원이다. 연세=연희전문+세브란스). 아무리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지만 상황이 이쯤 되고 보면 그 놈의 까마귀 신통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 걱정과 염려와 의심 때문에 언론과 사학의 “부적절한 관계”는 단절되어야 한다. 조선-연세 커넥션 자체가 우리 사회의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조선일보는 그 기자의 다수가 서울대 출신이니까, 이로써 우리나라 기득권의 핵심 카르텔은 대충 완성된 셈이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 웃기는 소리다. 서울대 내에서도, 세브란스 병원 내에서도 성골이네 진골이네 하며 뼈다귀 품격 따지는 동네다. 혈통이 아니면, 인간취급도 못 받는다.
서울대 교수의 약 90% 이상이 서울대 출신이다. 연세대는 자교 출신 비율이 약 80% 이상, 고려대는 70% 이상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대학들의 경쟁력이 형편없는 것은 이와 같은 근친교배에 의한 열성 유전자의 재생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국 대학에서는 교수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하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지는 옥스퍼드나 캠브리지가 미국 대학들에 비해 몰락한 이유를 예의 그 평등주의에서 찾고 있다. 이 기사는 물론 조선일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정작 하버드가 성공한 그 경쟁주의 내면에는 동료 교수들의 상호평가 및 강의 평가와 그에 따른 철저한 차별보상이 있었다는 점은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같은 대학에서 교수 진급이 허용되지 않는다. 부교수에서 정교수 되려면 다른 대학으로 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조교수 되면 끝까지 편하게 간다. 나이든 교수님들 친일하셨죠? 정도의 말만 하지 않으면 재임용 탈락하지 않는다. 자기 학교 출신이 많으니까 선후배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이런 전근대적인 구조를 타파하지 않고서 경쟁주의를 논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 카르텔의 한 축을 형성하는 조선일보가 스스로 이런 불합리함을 깨고자 노력하지 않으면서 평등주의를 비난하고 경쟁주의를 주장하는 것 또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 전가임이 분명하다.
누가 과연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을 원하고 있는가. 누가 그 방해자인가. 조선일보여, 서울대여, 그리고 연세대여. 대답하라.
4. 소수의 천재들보다는···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까. 나는 우리나라에서의 기득권에 의한 기회독점이 이공계의 위기와 전면적인 학문의 위기의 또 다른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해결책 또한 소수에게 독점된 기회의 확대와 더 많은 평등, 그를 통한 더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쪽으로 맞춰져야 한다. 추상수준이 좀 다르긴 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세 가지 해결책을 적어 보았다.
1) 고급 핵심 연구 인력의 양적 확대
2003년 초에 있었던 대통령과 일선 검사들과의 대화를 보면서, 격무에 시달리는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고 하는 검사들이 왜 더 많은 검사를 뽑는 것에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틈만 나면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판사나 검사 중에서 시대의 발전을 따라 갈만큼의 해당분야 법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소식인데, 사시 합격 정원 늘리면 많은 부분 해소된다. 이것은 국민들에 대한 법률 서비스 향상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바람직하다.
의료 쪽도 마찬가지다. 의대 정원을 점진적으로 늘려서 인턴이나 레지던트들 고생도 좀 덜어주고 국민1인당 의사 수도 더 늘어나야 국민 보건에 도움이 된다. 시장원리, 경쟁의 원리가 필요한 곳은 바로 이런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식적인 해결책을 여태 제대로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 안다. 해당 업계 종사자들의 기득권 때문이다. 그들은 경쟁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희소가치가 하락해서 권세도 하락하고 수입도 하락하고 사회적 인기가 하락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정책들을 결정한다.
대학 교수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도 대체로 경쟁을 바라지 않는다. 철밥통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교수들은 자기 연구실 문 닫고 들어가면 자신만의 왕국이 기다리고 있다. 의료나 법조계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인적 확대는 교수 사회에서의 경쟁을 유도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교수의 양적 확대는 사실 지금 우리나라 대학이 처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교수1인당 학생 수가 줄어듦으로 인해 교육의 질이 기본적으로 높아질 것이고 행정업무 부담도 그만큼 줄어든다.
무엇보다, “교수”라는 전문가 집단의 양적 확대 자체가 의미가 있다. 전문가나 실력자가 소수인 집단에서는 그들만의 카르텔을 통한 권력독점이 쉽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 개인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하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실 자기 분야의 다른 사람들에 의한 평가가 가장 정확한데, 그럴 사람들이 소수이거나 실력자와 이런저런 관계에 있으면 그 평가의 신빙성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공정한 경쟁은 기대할 수가 없다. 흔히 과학자들 평가 기준으로 제시하는 논문편수나 인용횟수, 아니면 논문 기여 정도 등에 허수가 끼일 가능성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학문 분야에서의 ‘규모의 경제학’을 실현할 때가 왔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잠시 확인했듯이 우리나라의 턱없이 부족한 핵심연구 인력 현황은 이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석사·박사 비율은 학사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대학 교수를 늘리는 것과 아울러서 독립적인 연구기관들 많이 만들어 이런 고급 인력들을 흡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학문하려는 사람들이 적은 이유는 나중에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 상황은 그나마의 고급 인력도 갈 곳이 별로 없는 처지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공계 출신들의 몸값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업계 종사자가 많아지면 그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도 자명하다.
한편으로 정부에서는 이른바 ‘시장’에서 인기는 없지만 국가 전략상 중요한 부문의 인재들을 양성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특히 나는 인문학에 대한 국가의 각별한 배려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역사 전문가의 필요성은 동북공정을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마당에 새삼스러울 게 없으리라 여겨진다. 이것은 사실 민족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가 아닌가. 이 뿐 아니다. 최근 학문의 추세 중 하나가 이른바 ‘퓨전’인데 첨단 공학의 발전이 오히려 인문학과의 결합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인공지능 공학자들은 문화인류학이나 심리학으로부터 인간 행동 양태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기초과학분야에서도 비인기 종목은 많다. 미 펜타곤이 최근 보고한 바에 의하면 향후 20년 내에 가장 큰 안보 위협은 기후 변화에 따른 식량·물·에너지 자원 확보 문제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기상전문가가 도대체 몇이나 될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해양전문가는 또 몇이나 될까. 지난 한일 어업협정 당시 일본은 우리 정부가 우리나라 어선의 포획량을 허위로 산출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자국 인공위성까지 동원해 상세한 데이터를 준비한 바가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지만 지금 우리는 그 외양간이나마 고치려고 하는지 심히 우려스럽다.
인문학이나 기초과학에 국가가 사활을 걸고 달려드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목전의 생존의 문제다. 지금껏 국가가 벌여 온 사업들 생각해 보면 그리 큰 돈이 들 일도 아니지만, 그 중요성이나 전략적 가치로 볼 때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도 이들 분야에서의 핵심인력 양성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율곡의 십만 양병설이 무시된 결과를 잊어서는 안 된다.
2) “제2의 기회”: 소수의 천재보다 다수의 장인을 위한 시스템
최근에 정부에서 발표한 과학기술 정책 중에서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이 이른바 "최고 과학자 선정“ 사업이다. 각 분야별로 뛰어난 과학자 열 명쯤 선정해서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면 노벨 과학상을 머지 않아 수상할 수도 있고 또 일선 연구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사기 진작도 될 것이라는 취지이다.
이렇듯 소수의 엘리트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책이 우리는 낯설지 않다. 그리고 이런 엘리트주의는 예의 그 “평등보다는 경쟁”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나는 이제 이런 정책의 유혹에서 정부나 학계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뿌리 깊은 엘리트주의 정책은 기득권의 독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는 엘리트정책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로지 엘리트주의에만 매달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왜냐.
첫째, 소수에 대한 몰아주기식 사업은 국가 긴급 상황이나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한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소득 2만, 3만 달러의 선진국 진입이나 세계 중심 국가 도약 같은 희망은 이처럼 수공업적인 방식에 의한 인재양성으로는 가당치 않은 개꿈에 불과하다.
둘째, 잠재력 있는 인재들은 포기된다. 우리나라의 인력정책은 비유컨대 바다 한가운데 빠뜨려 놓고 헤엄쳐서 살아 나오는 사람들만 건져 내서 수영 훈련시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도 돈 많거나 빽 있거나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중간에 그냥 구조된다. 반대로 말 잘 안 듣고 입바른 소리만 해대면 아무리 수영 잘해도 중간에 익사당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인재양성’이 아니다. 인재양성이란 말 그대로 능력이 좀 모자라는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자신들의 잠재능력을 극대화하는 과정이다. 단순한 천재선발 콘테스트가 아니란 말이다.
이 결과로 남는 것은 잘해봐야 고분고분한 천재들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윤이상이나 송두율은 그들의 능력과 업적에 무관하게 ‘역적’일 뿐이다. 사하로프나 솔제니친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 재능이 대접받지 못한 억울한 케이스라고 하던 것과 너무나 닮았다. 반대로 평화의 댐을 앞장서서 주장하던 어느 공학자는 그 ‘양심에 따른’ 행동 덕분인지는 몰라도 수년 후 서울대 총장이 되기도 했다. 내 주변에서도 단지 ‘실력자’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물리를 계속할 수 없었던 ‘천재’들이 몇몇 있다. 그들에게 또 다른 제2의 기회가 있었다면 나 같은 3류가 느꼈던 부끄러움이 조금은 덜했을 게다.
셋째, 평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경쟁력 있는 사회다. 천재 한 명이 수천 명을 먹여 살리지만, 정작 메이저리그 84년의 역사를 갈아 치운 것은 타고난 천재 이승엽이 아닌 평범한 연습벌레 이치로였다. 천재가 먹여 살리지 못하는 나머지 99.9%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 보통의 능력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먹여 살린다. 각자의 능력과 수준에 맞게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확보된 사회가 정말 경쟁력 있고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닐까. 그리고 종종 우리는 모차르트보다 더 위대하고 더 감동적인 살리에르를 목격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단지 몇몇 천재의 떡고물을 받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약소한 능력과 재능이나마 최대한으로 맘껏 발휘해서 우리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넷째, 시스템이 인재를 만든다. 우리나라는 유능한 천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만 기다리지만, 대개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보통 사람이 자기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야 정말 위대한 천재들도 빛을 볼 수 있다. 박찬호가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그저 공만 빠른 광속구 투수로 잊혀졌을 게 틀림없다. 메이저 18승 투수는 태어난 게 아니라 선진야구 시스템이 만든 결과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가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되려면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 사람들 데려와서 세계 최고의 인재로 키워낼 수 있는 그런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수준은 그 잘난 ‘한민족’조차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학계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본 같은 경우, 정말 학생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학생들에 비해 형편없지만 일단 그들만의 시스템에 편입되고 1, 2년 지나면 몰라보게 달라진다. 우리가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그들은 나름대로 큰 의미들을 부여한다. 일본식 장인정신이 살아남아 빛을 발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 학계는 정말 살벌하다. 나같이 평범한 3류 물리학자는 경멸이나, 잘해야 동정의 대상일 뿐이다. 다소 충격적이겠지만, 적지 않은 ‘실력자’들이 학생들을 ‘키워낼’ 생각보다는 혼자 공부해서 스스로 똑똑해진 학생이 어디서 굴러 오기를 기다린다. 이런 분위기에서 ‘인재양성 시스템’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해마다 석·박사 학생들은, 혹은 젊은 연구원들은 그 선배들이 해 왔던 똑같은 시행착오를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렇게 뛰어난 천재를 애타게 “기다리건만” 애석하게도 한국 물리학자 중에 아직 단일 논문 인용횟수 1천회 넘는 사람은 없다. 일본에는 10여명 있다. 노벨 물리학상을 ‘예약’해 둔 사람만 서너 명 된다.
어렵게 학문의 길을 선택한 인재마저 조금만 삐끗하면 보따리 싸야 하는 이런 풍토,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는 한 이공계 위기는 극복되지 않는다.
최고 과학자 선정 사업은 대규모적 인재양성 시스템에 대한 고민 없이 소수의 엘리트만을 위해 생각해 낸 대표적인 정책사례이다.
이 사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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