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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윤호의 Digital 評傳] 제프 라스킨과 리얼 매킨토시원문보기안윤호 (아마추어 커널 해커)
2005/03/11
애플컴퓨터의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제프 라스킨이 지난 2월 26일 61세로 타계했다. 췌장암이 사인이었다고 한다.
필자는 대단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과 함께 복잡했던 라스킨의 작업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얼마 후 많은 컴퓨터관련 웹사이트들이 대대적으로 라스킨의 작업을 재조명했다.
컴퓨터 혁명기인 1980년대 초 매킨토시의 초기 기획자로서, 그리고 여러 종류의 책의 저자이기도 했던 라스킨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매킨토시의 탄생 과정에서 라스킨은 컴퓨터를 가전기기와 같이 사용이 쉬운 기계로 설계할 것을 강조했으나 프로젝트 후반에 잡스와의 의견 차이로 애플을 떠났다.
제프 라스킨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매킨토시 팀에 대한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PARC의 기술을 애플에 끌어다 댄 장본인도 라스킨이었다. 잡스가 만들어낸 매킨토시는 더 커진 램과 마우스 그리고 잡스의 심미안을 반영한 특유의 디자인을 반영했다(필자는 이전에 ‘MS-애플「GUI 경쟁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라스킨의 입장은 컴퓨터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쉬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비싸서도 안됐으며 작고 간단해야 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크고 빠르고 복잡한 기종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라스킨은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복잡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매킨토시 개발에 대한 라스킨의 입장을 정리한 글은 ‘Holes in the Histories’라는 제목으로
http://jef.raskincenter.org/published/holes.html에 정리됐는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하지만 만약 라스킨이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게 됐으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매킨토시와 GUI의 세상을 만나게 됐을 것이다.
우선 라스킨은 마우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마우스를 이용하면 편리해 보일지는 몰라도 손의 기능을 100% 살릴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정작 마우스의 발명자인 엥겔바트 역시 마우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마우스는 앞으로도 사람과 컴퓨터의 교감에 있어서 중요한 방해물이 될지도 모른다. 미니멀리즘을 중시하는 그에게 있어 마우스조차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독자들은 마우스 없는 PC나 매킨토시를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캐논 캣 - 리얼 매킨토시(Real Macintosh)라고도 불린다. 지금도 캣의 애호가들은이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이스 바 밑에 두 개의 특별한 키가 보인다. 립(Leap)이라고 부른다.
컴퓨터 분야에서 라스킨의 최대 관심사는 워드 프로세서였다. 사람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중요한 이유는 결국 자료의 정리에 있고 워드 프로세싱보다 중요한 작업은 없다고 본 것이다.
사실 워드 프로세서보다 더 중요한 애플리케이션은 없을 것이다. 모든 중요한 작업은 자료들을 워드프로세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라스킨의 논점은 이 중요한 작업에서 키보드의 키를 잘 쓰는 일이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본 것으로 아예 특별한 키보드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만든 적도 있다.
라스킨이 만든 회사 인포메이션 어플라이언스(Information Appliance)는 무척 효율적인 키보드의 사용법을 개발해서 판매에 나섰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나중에 개발한 캐논 캣(Canon Cat)도 파격적인 제품이었으나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20년이 넘도록 계속 진행돼 아키(Archy)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지속되었고 올해 후반에 발표될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그의 아들인 아자 라스킨이 아키를 진행하고 있다.
“아키는 단순한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다”라고 시작하는 프로젝트의 설명은 역시 라스킨이 쓴 THE(The Humane Environment)라는 책의 설계 철학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THE에서는 기존의 윈도우 메타포가 효율적이지 않으며 보다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키는 파이썬(python)을 사용해서 구현됐다. 데모화면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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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라스킨의 말처럼 우리는 훌륭한 워드프로세서도 없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복잡한 화면, 너무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라스킨의 초기 워드 프로세서는 작은 수의 명령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10개 내지 15개 정도의 명령만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라스킨의 생각이었다.
이후에도 그의 근본적인 생각은 바뀐 적이 없다. 라스킨에게는 복잡한 ‘기계(machine)’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 줄 ‘기구(appliance)’가 필요했다. 그때와는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뀐 요즘에도 기계와 기구의 구별은 종종 모호하여 진정한 기구의 구현은 뒤늦게 이뤄지곤 한다.
필자는 휴대전화나 PDA를 볼 때마다 본질적인 기구로 얼마나 진화해가고 있는지 되묻곤 한다. PC도 마찬가지이다. 어플라이언스를 만드는 과정인 프로그래밍이나 설계 역시 너무 복잡하고 거추장스럽게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유비퀴터스 컴퓨팅이라는 개념과 인포메이션 어플라이언스를 주장한 라스킨의 관심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8비트가 사용되고 16비트의 CPU들이 세상에 조심스럽게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당시에 그의 주장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반대로 요즘에는 라스킨의 관점이 전혀 새로워 보이지 않는 것은 라스킨의 생각이 알게 모르게 성공적으로 세상에 파고 든 것을 의미한다. 독자들이 호기심을 느낀다면 그의 웹사이트였던
JefRaskin.com에 들러서 컴퓨터와 사람의 인터페이스를 집요하게 추구했던 라스킨의 글들을 읽을 수 있다.
컴퓨터 업계를 일찍 은퇴하고 의욕을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라스킨은 말년까지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책의 집필도 계속됐다. 때로는 모형 항공기의 디자인에 대해 빠져들기도 했고 새로운 RC조종기의 설계와 구현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라스킨의 이야기의 범위는 매우 넓고 쉽게 쓰려고 애를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들은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떤 글들은 벅민스터 풀러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심리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인지과학으로 학위를 받고 다시 컴퓨터로 빠져든 라스킨의 인터페이스 철학은 매우 특이했다. 때로는 철학을 넘어 윤리(ethics)의 수준까지 이르기도 했다.
좋은 디자인을 하나의 도덕적 의무로 보았고 인터페이스 디자이너의 윤리수준이 외과의사의 철두철미함 수준에 이르기를 바랬다. 나쁜 시스템 디자인은 사용자의 작업 내용을 해치거나 작업할 흥미를 잃게 만드는 것으로 역시 작업에 해를 가하게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나중에는 ‘cognetics’라는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 용어는 "the ergonomics of the mind"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공학이 효율을 개선시킨 것처럼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의 지적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봤다. 피아노나 다른 악기들의 경우를 보면 연주자의 몸과 완전히 밀착되는 것으로 창조적 생산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작업들을 간단하고 쉽게 만들어 주려고 했던 제프 라스킨은 반대로 매우 복잡하게 살았다. 이력서가 복잡한 것으로는 라스킨을 따라갈 사람이 별로 없을 듯하다. 컴퓨터는 그의 여섯 번째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수학, 철학, 음악, 그리고 물리학을 공부했다. 철학박사를 따기 위해 공부하다가 컴퓨터 사이언스로 석사학위를 따고, 음악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다가 미술교수가 된 후 스탠포드의 인공지능연구실에서 객원 학자가 되기도 했고 후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에서 지휘를 하기도 했으며 음악도 가르쳤다.
그럴 즈음 퍼스널 컴퓨터가 나와서 라스킨의 욕구를 자극했다고 한다. 라스킨은 컴퓨터 매뉴얼들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애플을 포함한 다른 회사들의 매뉴얼을 써주는 것으로 컴퓨터 업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필자는 라스킨이 오래 살아서 초기의 꿈의 연장선인 아키가 어떤 반응을 얻는가를 봤으면 했다. 이제 상업적인 성공 뿐만이 아니라 라스킨이 아키라는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피드백을 얻을 수도 없게 됐다. 그리고 그의 용감하고 새로운 도전을 구경할 기회도 함께 없어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