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작은 벤처회사가 성숙된 업체로 변모함에 따라 구글은 여전히 IT분야 종사자들이 선망하는 직장으로 계속 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구글은 최근 MS 같은 대기업 출신의 인재들을 영입하고 있으며 올해 초에 있었던 IPO(기업공개) 이전에 구글을 일으켜 세운 직원들을 붙잡아 둬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들 기존 직원들은 IPO를 통해 새로운 백만장자로 부상했다. 또한 구글은 스톡옵션과 같은 미끼 없이도 새롭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술분야에서 우위를 지키면서도 시장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한때 MS, 야후, 시스코 같은 기업들도 '가장 일하기 좋은 IT 업체'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성장하고 해가 갈수록 이들의 그런 명성도 빛을 바랬다. 구글 역시 약 2700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큰 목표를 위해 첨단 기술을 개발한다'는 성공 방정식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주피터 리서치의 애널리스트 게리 스타인은 구글의 경우 잠재적인 경쟁자인 오픈소스 공동체에 비교적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말했다. MS는 성장하고 있는 오픈소스 커뮤니티의 움직임에 못마땅해 하는 입장인 반면 구글은 이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이것은 구글이 기술적인 명망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스타인은 "구글은 아직도 해커들의 공동체에 일원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것은 구글에게는 긍적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과감한 도전 구글은 1998년 스탠포드 대학 전산과 출신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 의해 세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회사는 곧 인터넷 검색의 선두업체가 됐다. 당시 웹사이트의 인기를 기반으로 구글의 단순한 디자인과 방식은 두각을 나타내기 충분했다.
구글은 스스로를 기술 전문가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인 동시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통로라고 규정하고 있다. 구글은 자사 웹사이트에서 "구글을 지겨워하는 엔지니어는 없을 것이다. 매일 친근한 동료, 환상적인 프로젝트, 그리고 수천명만명의 일상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소위 '구글러'들은 색다른 자유를 누리고 있다. 회사는 모든 직원들에게 근무시간의 20%를 개인 프로젝트에 투입할 것을 권하고 있다. 때때로 이런 프로젝트들은 거대한 컴퓨터 용량을 규모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 구글은 까다로운 컴퓨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10만대 이상의 서버로 구성된 서버팜을 구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글은 또한 근무환경 측면에서 최고의 닷컴 업체으로 손색이 없다.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위치한 '구글플렉스' 본부는 무료 점심, 직장의 치과진료, 애완견을 동반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지미 카터, 알 고어, 기네스 펠트로와 같은 유명인사가 방문해 이곳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구글, 취업시장에서 연일 상종가 이런 괴상함과 특이함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그런 특징들로 인해 구글은 지난 8월 있었던 IPO를 통해 16악 60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끌어 모았다. 당초 주가가 치솟는 것을 막기 위해 경매방식을 사용했지만 이 회사의 주식은 현재 최초가인 85달러의 2배 이상의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해 부터 구글은 인터넷 검색에서 벗어나 기술을 확장하고 있다. 이메일, 데스크톱 검색, 디지탈 비디오 검색으로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이들 분야에서 구글은 MS나 야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까지 구글의 실적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비춰졌다. 한 MS직원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구글에게 경의와 우려를 동시에 표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지금 G메일, 구글 툴바, 구글 데스크바, 구글 데스크톱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MS를 위해 일하고 많은 주식을 갖고 있으며 나의 회사가 성공하길 바라지만 구글이 MS를 위협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라고 적고 있다.
구글은 지금 비서에서 변호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영업 사원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신규채용을 진행하고 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지원서가 밀려들고 있다. 구글은 하루에 1000장 이상의 이력서를 받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기술인력 업체 관계자는 "구글은 사람들이 흥미를 갖기에 충분한 곳이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그는 구글의 경쟁사를 위해 일하고 있다.
올해 구글은 MS의 레드몬드 본부에서 가까운 워싱턴주 커클랜드에 사무실을 열었다. MS 소프트웨어 개발자 아담 바는 자신의 블로그에 새로운 사무실 오픈이 MS 직원을 영입하기 위한 수순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지난 10월에 "MSN서치 분야의 직원들을 영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글은 이미 검색 엔진 분야에서 진출해 있으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구글과 회사 주식이 전체적으로 상한가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MS내에서 불투명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MS 직원 영입, 심화되는 신경전 이달 초 시애틀 타임즈에는 구글이 MS 직원 몇 명을 영입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MS의 윈도우 책임자인 짐 올친은 몇 명의 직원이 구글로 옮겼다며 없어서는 안 될 직원 몇 명을 구글에게 뺏겼다고 전했다.
구글이 채용시장에서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다면 상대적으로 MS는 좀 주춤한 상태인 것을 올친도 인정했다. 올친은 “지난 2년 동안 누려온 인기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캠퍼스 채용에서는 MS의 인기는 여전하다"고 말했다.
MS의 한 개발자는 잠시 구글에 지원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오랜 근무시간을 걱정돼 포기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그는 "구글도 다른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곳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구글은 이러한 우려에 대해 언급을 거부했다. 구글은 웹사이트에서 '가족적인 근무환경'을 약속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일의 강도가 세다는 점도 인정했다.
올해 초 구글은 구인, 채용, 채용과정에 있어서 40세 이상의 지원자를 불평등하게 처리한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구글은 그 소송이 근거 없다며 일축했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 구글은 유명한 기술 전문가들 몇명 끌어오는데는 성공했다. 이들 중에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개발에 참여했으며 BEA 와 MS에 근무했던 아담 보스워스, MS의 차세대 그래픽 엔진 아발론에 참여했던 MS의 베테랑인 조 베다도 있다.
또한 구글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개발자인 조슈아 블로치도 영입했다. 블로치는 자바 프로그래밍 언어와 API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s)의 주요 개선 방안을 생각해 냈다. 또한 이보다 한참 전에는 전 노벨 CEO 에릭 슈미트도 영입했다.
또 다른 위협 이런 구글의 성공은 그러나 새로운 위협을 만들어내고 있다. 구글의 회사 규모가 커짐에 따라 긴밀한 팀이라는 동적인 느낌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이는 모든 성장 기업들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구글은 5만 7000명을 고용하고 있는 MS의 규모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글은 3월말 이후 750명 이상의 직원을 늘리는 등 지금도 끊임없이 증식중이다.
구글이 IPO를 단행하고 유명한 기업이 됐기 때문에 '엄청난 땀'을 투자해 스톡옵션으로 떼돈을 버려는 사람들을 끌어오기는 어렵게 됐다. 투자업체 퍼스트 올바니의 주식 애널리스트인 제이슨 아빌리오는 현재 구글의 주가가 185 달러까지 오르긴 했지만 내년에도 이와 같은 추세로 오르기는 힘들 것으로 전망했다. 아빌리오가 책정한 향후 12개월 내에 구글의 주가 목표액은 195 달러다. 그는 "구글은 직원들에게 과거 수준으로 주식을 보상해 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IPO를 거친 다른 업체들처럼 구글도 새로운 직원이 수백만 달러의 스톡옵션을 가진 기존 직원을 시기하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한 구글은 재능 있는 직원들 중 스톡옵션을 현금화하고 일찍 은퇴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도 시달리고 있다.
구글의 HR 담당자인 스테이시 설리번은 "그 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하고 있으며 이를 막기위한 대책을 강구중이다"고 말했다.
설리반은 구글이 이들 직원에 대해 유연한 근무시간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구글이 내년 초 구글플렉스에 도입하게 될 탁아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또한 직원들을 붙잡아 두기위해 흥미로운 일거리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전했다.
현재까지 구글은 IPO 이후의 시기를 잘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글은 이력서 접수 숫자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피터의 스타인은 많은 직원이 구글을 떠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구글이 업계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마치고 나면 고유한 마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최근 구글이 주요 도서관에 소장된 도서의 디지털 복사본을 만든다는 계획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는 "구글이 직원들에게 판매할 만한 것들을 만들라고 요구한다든지 평범한 프로젝트을 수행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글의 설립자인 페이지와 브린은 높은 이상을 갖고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며 직원들의 처우를 잘할 것임을 분명해왔다. 구글은 기존 관리자들의 힘을 유지시킬 계획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2중의 주식 시스템을 통해 달성된다.
그러나 현재의 믿음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른 기술업체들은 장기적 안목을 가진 지도자를 잃었다. 스타인은 애플컴퓨터의 잡스와 워즈니악이 회사에서 쫓겨난 것을 예로 들었다.
한편 검색분야 제왕 구글은 다양한 업체로부터의 경쟁상대로 인식되고 있다. 대기업 MS를 비롯해 야후, 신생업체인 블링크스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위협 뿐만 아니라 구글의 핵심 사업인 웹 검색은 선호도가 급격히 바뀔 수 있는 분야로 MS가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데스크톱 서치와 G메일과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구글은 최근 몇 달간 웹검색분야의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구글이 웹 브라우저 기술을 개발중이라는 소문도 있다.
오픈소스와의 결탁 새로운 사업분야로의 진출은 구글이 파이어폭스 브라우저로 성공을 거둔 오픈소스 공동체와 경쟁관계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글은 자사가 주최한 모질라 그룹의 파이어폭스 개발에 대한 행사에서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공격하는 것보다 수용하는데 관심이 있다고 시사했다. 그리고 모질라는 파이어폭스 브라우저에서 구글을 기본 검색 엔진으로 삼아 이에 보답했다.
또한 구글은 최고의 기술 인력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구글은 프로그래밍 대회, 특이한 광고판등 다양하고 독특한 방법을 활용해 채용을 실시하고 있다. 구글의 구인광고에는 '검색 트래픽의 계절성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시를 써라'는 적성 테스트가 제시돼있다.
괴짜 같은 태도를 가지면서도 기술적 우위를 가지고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있는 구글은 일반 대중과 개발자 공동체의 신뢰를 산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레드몽크 연구소의 애널리스트 스티븐 오그레이디는 구글이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의견을 정확히 하지 않은 채로 있다면 오히려 평판이 나빠질 수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구글이 보다 많은 정보를 축적함에 따라 문제는 더 많이 생겨날 것이다. 정보 관리인이란 자리는 엄청난 책임감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구글은 정보관리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인지하는 측면에서 별로 보여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콘/페리 인터내셔널에서 경영진 채용의 기술적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리차드 스피츠는 구글의 부상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 회사의 가치를 높여준 인터넷을 통해 또 다른 스타 기업이 생겨날 수 있다고 전했다.
야후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스피츠는 구글의 창립자들이 비전에 충실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많은 회사들이 그 인기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훌륭한 기업들이 과거에 직면했던 도전들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
산속에서 약 20년 정도 면벽수도하지 않았다면 현재 리눅스가 MS의 데스크톱 지배에 대한 경쟁자임과 동시에 많은 기업 조직들의 서버 솔루션에 대한 대체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리눅스는 삼바를 통해 윈도우 파일과 프린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MS 윈도우 기반 클라이언트와 서버 사용자들을 수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MS 솔루션에 대한 대체 노력에 더욱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사실 이 글은 MS가 노벨 넷웨어 사용자를 수용할 때 MS가 작성한 핸드북에서 발췌한 내용이며 나중에 내용이 약간 변경된 바 있다.
삼바는 무엇인가? 삼바는 지금 막 튀어나온 따끈따끈한 솔루션은 아니다. 1992년 이래로 계속 제공돼 왔으며 거의 대부분의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마찬가지로, 삼바 또한 매년 그 내용이 보다 풍부해지고 안정적인 솔루션으로 변모해 왔다.
삼바는 리눅스로 파일, 프린트 서버를 옮기기를 고려하는 시스템 관리자에게 확실한 선택사양으로 자리잡을만큼 발전을 거듭해왔다.
또한 삼바는 저렴하게 스토리지 솔루션을 구축하는 훌륭한 대안이다. 삼바가 지원하는 IDE RAID 카드를 서버에 꽂고 리눅스를 설치하라. 이후 삼바를 구동시키면 저렴한 비용으로도 대용량 스토리지를 네트워크에 훌륭하게 배치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여행중인 임직원들의 노트북을 백업하거나 각 부서들의 장기간에 걸친 정보 집적 요구에 대한 이상적인 백업 솔루션이다.
서버 매니지 블록(SMB) 삼바를 설치하기 전에 삼바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삼바는 서버 매니지 블록(SMB)이라 불리는 윈도우 파일·프린트 공유 프로토콜을 모방하는 방법으로 운영된다.
SMB는 윈도우가 등장하기 이전인 1980년대 인텔, MS, IBM, 제록스, 그리고 쓰리콤 등이 창안한 바 있다. 비록 지난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확장돼 왔지만, 그 기초적인 토대는 여전히 똑같이 유지되고 있다.
MS는 SMB를 CIFS로 명명한 최초의 기업이다. 이런 행보는 바로 MS가 넷바이오스(NetBIOS)를 선택하면서 SMB에서 자신을 이격시키려 시도한 것에도 이유가 있다. 넷바이오스는 MS에게 있어서는 훌륭한 툴이었지만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내부 네트워크나 인터넷 자체에 기반을 두고 연결된 컴퓨터들에 대응하는 기능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바는 대부분의 윈도우 버전과 전반적으로 호환되는 SMB, 또는 CIFS 버전을 구동한다. 때때로 MS는 삼바의 뒤통수를 치는 방법으로 다운되게 하기도 한다. 바로 윈도우 2000 서비스 팩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인증 방법이 삼바를 다운시키는 것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삼바를 재가동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레지스트리를 조작해 인증 수단을 다시 되돌려 놓는 것뿐이다. 대규모 통합 작업이 이뤄질 때마다 이러한 작은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바는 윈도우 내외부 모두의 파일·프린트 서비스에 대한 안정적인 해결책이다.
삼바 설치 삼바 업데이트는 레드햇 9 버전의 출시 이래로 계속 제공돼 왔다. 지금 바로 가능한 업데이트 내용을 레드햇에서 다운로드 하길 권한다. 레드햇의 삼바 업데이트 페이지를 확인해보라.
‘swat’라 불리는 설정 도구를 포함해 삼바의 모든 부분을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swat를 사용하진 않을 것이지만 swat은 삼바의 복잡한 선택사항을 설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유용한 툴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삼바 기본 설정 삼바 설정 작업을 제어하는 파일은 ‘/etc/samba’ 디렉토리에 있으며 이름은 ‘smb.conf’다. 삼바를 구동시키기 위해서는 이 파일에 반드시 다음과 같은 기초적인 편집 작업을 해줘야만 한다.
삼바에 LAN을 포함시키려면 반드시 호스트 허용 라인을 변경해야 한다. 만약 이 라인을 편집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시스템에 접속하지 못한다.
이 라인에는 반드시 LAN의 프리픽스(prefix)가 포함돼야 한다. 예를 들어 연구실 네트워크가 10.254.1.0/24에서 운영된다면, 네트워크의 모든 시스템들이 삼바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위해 10.이나 10.254. 또는 10.254.1 등을 호스트 라인에 입력해야 한다. 물론 네트워크 주소의 상세화 정도를 낮출수록 다른 사람들이 삼바 서버에 접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늘어나게 된다.
패스워드 삼바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하는 데 있어 마지막 단계는 사용자 계정에 패스워드를 설정하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리눅스와 윈도우가 패스워드 저장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SMB 패스워드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유틸리티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콘솔에 ‘smbpasswd -a root’라고 입력하면 간단하게 실행시킬 수 있다.
이 유틸리티로 선택된 사용자에 대해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으며 위와 같은 경우에는 root 사용자가 된다. 일단 이 과정이 완료되면 root 사용자는 윈도우 시스템을 사용하는 컴퓨터를 통해 삼바에 설정된 기본 공유 파일에 접속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용자의 홈 디렉토리와 설치된 프린터 선택 등을 할 수 있다.
윈도우에서 리눅스로의 연결 테스트 삼바가 구동된 리눅스 시스템과 연결이 제대로 되는지 테스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동일 네트워크 상의 윈도우 탑재 컴퓨터로 접근해보는 것이다. 시작 메뉴의 실행을 클릭해 뜨는 실행 상자에 ‘\’를 입력하고 삼바 서버의 IP 주소를 적어라.
IP 주소를 이용하는 것은 네트워크 상에서 이름을 결정짓는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을 줄여준다. 컴퓨터의 이름으로도 테스트해볼 수 있지만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해야 한다.
자, 이제 사용자명, 패스워드 입력을 요구받아야 정상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위에서 만든 사용자 이름인 root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라. ‘Root’로 명명된 폴더와 ‘Printers’로 명명된 폴더를 포함한 폴더가 나타나야 한다. 프린터 폴더는 비록 삼바 서버에 설치한 프린터가 없다고 할지라도 나타날 것이다.
만약 사용자명과 패스워드 입력 과정이 제시되지 않았다면 삼바가 리눅스 시스템에서 가동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smbd 프로세스가 구동되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명령어 입력창에 ‘ps -ea | grep smbd’를 입력해 체크해볼 수 있다.
만약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는다면 특정 이유로 삼바가 시동되지 않은 것이다. 이 경우에는 ‘/var/log/samba’ 디렉토리로 가서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로그 파일을 검토해 볼 수 있다.
리눅스에서 윈도우로의 연결 테스트 리눅스에서 윈도우 시스템에 연결하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 첫 단계는 네트워크 공유 자원을 마운트할 마운트 포인트를 만들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mnt/smb’를 예로 들어보자. 이 디렉토리는 ‘root’나 드라이브의 루트로 로그인했을 때 ‘mkdir/mnt/smb’ 명령어로 만들 수 있다.
일단 디렉토리를 만들었다면 공유 자원을 마운트하기 위해 마운트 명령어를 입력할 수 있다. 그러나 마운트 명령어와 삼바에 관련해 반드시 인지해야 할 3가지 핵심 사항이 있다.
첫째, 파일 시스템 유형은 smbfs다. 이것은 반드시 마운트 명령어 라인에 ‘-t smbfs’라고 적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원격 시스템의 사용자명은 로컬 시스템과 동일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따라서 사용자명은 반드시 구체화돼야 한다. 이 작업은 아래 문구를 적음으로써 수행할 수 있다.
-o username=domain\user
도메인을 사용자와 분리하기 위해 사용자명 앞에 ‘\가 있다는 것을 유념하라. 커맨드 쉘이 ’‘를 해석하는 방법 때문에 꼭 입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윈도우는 보통 공유 용도의 UNC 경로에서 ‘’를 사용한다. 유닉스 커맨드 쉘에서의 ‘’의 해석 문제 때문에 마운트 명령어는 ‘/’를 사용한다. 따라서 마지막 명령어는 아래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mount /mnt/smb //server/share -t smbfs -o username=MYDOMAIN\Administrator
이렇게 입력하면 이제 패스워드를 묻는 과정이 제시될 것이다. 여기서 패스워드를 입력하면 미리 정의했던 마운트 포인트로부터 원격 공유 자원의 파일들에 접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mnt/smb’가 된다.
앞으로의 지향점 삼바의 지원에도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 단계에서 삼바는 윈도우 2000이나 윈도 XP 클라이언트와는 조화를 잘 이루고 있지만 MS의 액티브 디토리터리 구조와는 완전히 통합되고 있지 않다. 아마 3.0 버전이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부분이다.
3.0 버전은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시간에도 계속 개발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베타 테스트 상태다.
삼바의 진정한 목표는 혼합된 운영체제 환경이 가져오는 여러 가지 도전과제 중 하나를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파일·프린트 액세스란 과제는 대형 부서에 있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며 삼바는 이를 개선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
다치바나 다카시의 탐사 저널리즘 황영식 지음 304 쪽 | 2000년 11월 01일 중앙M&B ISBN : 8983755164
한국일보에서 나온 책 소개 [한국일보] 2001-01-19 (문화) 뉴스 15면 ■다치바나 다카시의 탐사 저널리즘 / 황영식 지음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의 탐사 저널리즘을 소개한 책이다. 다치바나는 1970년대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총리의 금권 정치 실상을 파헤쳐 결국 총리직 사임까지 불렀다. 일본 조사보도의 기념비로 꼽히는 이 보도사건 후 그는 과학의 세계로 발을 디뎌 이제는 과학 전문저널리스트로 국민적 신망을 받고있다. 한국일보 도쿄 특파원인 황영식 기자는 "한국 언론이 일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베껴왔지만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뒤늦은 자각 때문에 다나카의 작업을 소개한다"고 밝혔다. 중앙 M&B 발행. 9,000원.
목차
1장 일본 조사보도의 선구자
'다나카 연구'가 갖는 의미 배경 - 다나카의 성장과 금권 체질 대결의 서막 - '7월 정변'의 내막 '다나카 연구'의 충격 조사보도로서의 의의
2장 '거악'과의 싸움
빛바래는 '금맥' 보도 적절한 시기에 터진 록히드 사건 다나카와 다치바나의 대결 3라운드
3장 보다 넓어지는 관심 - 과학의 세계로
우주와 진화, 그리고 뇌의 탐구 훌륭한 구경꾼이 되라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 일반교양의 전도사 노력은 좋은 기자를 만든다
지은이 소개 황영식 1958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한국일보에서 입사, 정치부, 국제부, 문화부 기자와 도쿄 특파원 등을 거쳤으며, 현재 문화부장을 맡고 있다. 지은책으로 <다치바나 다카시의 탐사저널리즘>이 있다.
이 글은 중앙M&B에서 나온 "다치바나 다카시의 탐사저널리즘"(황영식 지음)이란 책에서 뽑은 글입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소개
다치바나 다카시는 1940년 5월 나가사키(長崎)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필명과 발음은 같지만 한자는 다른 橘隆志. 1968년부터 현재의 필명을 사용해왔다. 다치바나(橘) 가문은 이바라키(茨城)현 미토(水戶) 일대에서는 유명했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낭인이 정착해 염색집을 열었고, 이 염색집에서 갈라져나온 목재상이 바로 그의 집안이지만 할아버지대에 거의 몰락하다시피 했다. 미토의 다치바나 가문에서는 전쟁 전에 다치바나 다카사부로(橘孝三郞)라는 우익 사상가가 나왔다. 미토에서는 처음으로 일고(一高)에 들어간 것으로 유명했던 그는 오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미토로 돌아와 농촌청년을 위해 애향숙(愛鄕塾)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웠고, 다치바나 일족이 이를 총지원했다. 다카사부로의 사상적 근원은 농본주의라고 할 수 있었느나 갈수록 천황주의적 경향이 강해졌다. 그는 다카시의 당숙뻘이었다. 아버니 다치바나 노리오(橘經雄)는 와세다(早稻田) 대학 국문과 출신으로 졸업 직후 나가사키의 기독교계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이 학교는 총각교사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나가사키 부임을 앞두고 미토의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누님(다키시의 고모)의 애제자인 류코(龍子)라는 여학생과 결혼했다. 다키시는 이들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카시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는 문부성 관료가 됐다. 다카시가 만 2세 되던 1942년 중국 베이징(北京)의 일본계 사범학교 부교장으로 부임했다. 다카시도 제 2차 세계대전이 끌날 때까지 중국에서 지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온 다치바나 일가는 이바라키 현 히가시이바라키(東茨城)군 나카니시(那珂西)에 있던 외가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이듬해 미토로 옮겨간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단신으로 도쿄(東京)로 올라가 전국출판협회라는 단체 사무국에 들어가 기관지인 ≪전국출판신문≫의 편집장이 된다. 이신문이 나중에 ≪독서타임즈≫로 바뀔 때까지 편집장을 맡았으나 나중에 ≪독서신문≫과 합병해 ≪주간 독서인≫이 되자 이와타니 오니시(巖谷大西)씨가 편집장을 맡고 아버지는 영업직으로 돌아야 했다. 다치바나가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게 된 것도 이런 아버지의 영행을 무시하기 어렵다. 그의 아버지는 애초에 소설가 지망생으로 대학 졸업 후 줄곹 소설을 써오다가 ≪주간 독서인≫ 시절에는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 또한 사회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대도시가 싫어서' 또 '아이들 교육을 위해' 미토에 남았던 어머니는 자유학원(自由學園)의 설립자이자 잡시 ≪부인의 벗(婦人之友)≫창간자인 하네히토 모토코(羽仁もと子)의 추종단체의 '벗의 모임(友之會)'의 활동가였다. 그렇다고 특별히 자녀교육에 있어서 자유방임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할 일을 정확히 하도록 시켰다. 교육에 대한 열성도 대단했다. 다치바나가 이바라키 사범학교(이바라키 대학 교육학부의 전신)부속 초등학교를 거쳐 같은 부속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는 이바라키 사범학교 교수에게 상당한 돈을 주고 영어과외를 시켰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한 것이었다. 그것도 영어 해석과 영어 작문 선생님을 따로따로 붙었다. 이런 어머니의 배려로 다치바나는 외국어에 대한 자신감과 흥미를 가질 숭 ㅣㅆ었다. 1956년 중학교를 마치고 지방명문인 이바라키 현립 미토(水戶)제1고등학교에 입학했던 다치바나는 이듬해 집이 치바(千葉)현 가시와(柏)시로 이사함에 따라 도쿄 도립 우에노(上野)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수재 소리를 들었고 특별히 공부때문에 고생한 일은 없었다. 다만 타고난 음치였던 관계로 음악성적은 늘 최하위였다. 중학교 1학년 이후에는 아예 시험시간에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나중에 ≪분게이순주(文藝春秋)≫입사시험에서도 면접시험에 노래 부르는 것이 들어있었으나 거부했다. 반면 체육과목에서는 달리기나 구기는 소질이 없었으나 넓이뛰기, 높이뀌기에는 빼어난 실력을 보였다. 중학교 때 육상부에서 높이뛰기와 삼단뛰기 선수생활을 했고 기록도 뛰어나서 일본 전국에서 1,2위를 다투어 중학생 선수로서는 유명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선수생활을 계속했으나 전학한 도쿄 도립 우에노 고등학교에 육상부가 없어 운동을 그만두었다. 그의 독서열은 뿌리가 깊다. 1995년 말 베스트셀러가 됐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대한민국에서는 일부가 번역되 2001년 9월 출판하였다.)에서 그는 중학교 3학년때 쓴 <나의 독서를 되돌아본다>는 그을 실었다. 학교에 들거가기 전부터 시작된 책 편력에 대한 것이었다.(생략) (생략된 부분은 <나의 독서를 되돌아본다>글은 대한민국에서 발간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찾아보기시 바랍니다.) 그는 특히 중학교1,2학년때를 "다독(多讀), 남독(濫讀)의 시대였다."며 일본과 세계의 고전 이름을 무수히 들었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로부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까지 많은 책 이름을 들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은 기대했던 정도의 작품은 되지 못했다. 대개 '이건 훌륭한 작품', '저건 세계적 명작'이라는 권유나 독서평에 따라 기대를 품고 읽어보면 실망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많다. 괴테의 시가 좋아 몇 번이고 읽었다. 그의 시는 내게 슬플 때, 즐거울 때, 외로울때, 기쁠대, 괴로울 때 시를 짓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또 같은 책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떤 의미에서 인생에서 가장 책을 읽지 않는 것 아니냐. 시험공부에 시간을 빼앗기게 되니까'"라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래도 읽기는 제법 많이 읽었다." 다치바나의 이런 독서경력은 문과 쪽 취미가 강했음을 시사하지만 실제로는 앞에서 밝힌 대로 이과 지망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다케우치 히토시(竹內均)-(※이 책저자는 竹內均을 다케우치 나라스라고 읽고 썼다. 그러나 제대로 읽는 일본식 음은 다케우치 히토시이다. 그는 지구물리학자로 일본에서 발행하는 과학잡지 NEWTON(한국, 대만등의 세계 여러나라에 번역되 출간하는 과학 잡지)의 발행인으로 2004년 4월 죽을때 까지 NEWTON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였다.)가 쓴 두권짜리 ≪현대 과학 이야기≫가 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자극했다. 분자나 원자니 하는 당시로서는 첨단의 과학 이야기를 다룬 이책을 읽고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 하나 ≪에디슨 전기≫란 책에도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미토에서의 중학교 시절 늘 동네 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서서 읽고 좀체 책을 사서 읽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를 졸라 이 책만은 사서 읽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진학지도 교사로부터 색약이어서 이과 진학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 낙담했다는 애기는 앞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그 순간 그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법학부나 경제학부에 들어갈 생각을 추호도 없었다. 관료가 된다든가, 회사원이 되는 인생의 경로는 머릿속에 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까닭인지 '과학자가 될 수 없다면 저널리스트가 될까' 하는 생각은 있었다. '기자는 참 훌륭하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도쿄대학 문학부에서 불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그는 공부와 독서에 열중했다. 특히 '무엇이든 시대의 유행에 등을 돌리는' 성벽때문에 남들이 피하거나 소홀히 하는 분야일수록 파고들었다. 졸업논문 주제도 '메느 드 빌랑'이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혁명 시대의 철학자였다. 대학시절 그는 시를 써서 발표하고 대학신문 현상공모에 소설을 써내기도 했다. 시는 본면으로 썼지만 소설은 '미즈치'라는 필명을 썼다. 소설에 몰두한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문학부 학생들은 누구나 작가 지망생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같은 불문과 4년 센배였던 관걔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글을 써서 그를 능가하자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었다고 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교내의 '은행나무 가로수상' 2등, '오월제상' 1등을 받은 반면 다치바나는 모두 장려상에 그쳤다. 1964년 졸업과 동시에 취직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오에 겐자부로를 능가하겠다는 꿈은 무산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금 일본에서 다치바나의 영향력은 오에 겐자부로를 크게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졸업과 동시에 분게이순주(文藝春秋)사에 입사, ≪슈간분춘(週刊文春)≫에 배치됐다. 특집기사 담당으로 당시 제법 인기있던 <이 사람과의 일주일>이라는 연재 특집기사를 주로 썼다. 화제의 인물을 일주일 동안 따라다니며 이모저모를 알리는 기사였고 자연히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부드럽고 쉬운 기사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66년 사보에 '퇴사의 변'(※주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 실러 있습니다.)을 싣고는 돌연 사직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월급이 너무 적어 생활이 어려웠던데다 입사 3년째를 넘으면 감히 그만둘 엄두를 못내고 그자리에 붙잡히리하는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듬해 도쿄대학 철학과에서 학사편입한 그는 한동안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나 거의 대부분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철학공부에 빠져 소설가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나중에 그는 이에 대해 어렇게 회고했다. "나에게는 바람기 같은 것이 있다. 하나의 소설을 쓰기 시작해 환결할 때까지 잡고 있지 못했다. 도중에 다른 것이 쓰고 싶어져 이리저리 옮게가는 버흑이 있어 미완성 작품이 부지기수였다. 또 역시 소설가란 차근차근 써나가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소설가의 소질이 없다는 판단을 했던 셈이다. 또 하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간지 기자로서 현실세계 끝까지가 깊숙한 곳의 싶이, 어두운 곳의 깊이 같은 것을 대하다 보니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에 돌아와 철학을 정말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문학 따위는 시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실과 철학의 세계에서 보니 문학은 대단히 몹쓸 일이었다.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학시절은 일본 학생운동사에서 최대의 격동기였다. 1960년의 안보투쟁 이래 해마다 대학은 소요로 시끄러웠다. 더욱이 분게이순주(文藝春秋)사를 그만두고 철학과에 학사 편입한 이듬해인 1968년에는 바로 도쿄대학 휴교사태를 부른 '전공투 운동'의 해였다. 그러나 두 번째 대학생활에서 그는 현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나의 관심은 완전히 현대에 등을 돌리고 있었고 고대로부터 중세에 걸친 사상가, 그중에서도 특히 신비주의자들에게 쏠려 있었다. 자연히 관심은 한편으로 고대사로부터 역사 이전의 시대, 고고학으로 향했고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성립과정으로부터 구약성서학과 오리엔트 이교, 인도의 고대사상으로 기울었다. 더욱이 유럽의 암흑기에 고대의 사상적 후계자로서 그것을 다시 활짝 피었던 이슬람 사상가들과 페르시아의 신비 시인들에게까지 관심이 쏠렸다. 당시 내 머리는 그리스어, 라틴어, 헤브라이어를 쑤셔넣기에 바빴고 스스로가 살고 있는 현대라는 시대에 대해서는 거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대를 초월한 세계 속에서 놀면서 사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현대사회에 참여(engage)하는 따위는 엿먹어라 하는 것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대할 때의 내 기본적인 심적 접근법이었다. 나는 완고하게 시대를 거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해 대학에 남으려던 생각에서 시작된 그의 철학공부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다른 수입원이 없었던 그는 철학과 시적에도 ≪슈간분순(週刊文春)≫에 연애소설을 기고하고 ≪영레이디≫의 앵커(특집기사를 맡아 총정리하는 역할)로서 일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전공투 열풍에 말려 도쿄대학이 휴교를 하고 휴교기간의 수업료 문제로 옥신각신 실갱이가 벌어지면서, 그는 수업도 하지 않았는데도 수업료를 내야 한다는 학교측의 주장에 반발, 학교를 그만두었다. 당시 대학의 모습에서 많은 실망을 느낀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대학 교수가 된다는 것이 영 신통찮아 보였다. 우선은 도쿄대학 휴교 당시 교수들의 어정쩡한 태도를 보아야 했고, 대학원 수업을 도강하면서 학교 또한 연줄과 파벌이 판을 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 학계의 보스격인 도쿄대학교수가 잚은 학자의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보스와 좋은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좋은 대학에 취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학교를 그만둔 그는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1960년 '안보투쟁'주역들의 이야기나 전공투 운동에 대해 글을 썼고, 차츰 범위를 '생물학 혁명'같은 쪽으로 넓혀나갔다. 당시 갓 창간된 ≪쇼쿤(諸君)≫이 다치바나의 밥벌이를 위한 글쓰기 작업을 지탱했다. 주로 '기상이변'등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을 다루었다. 다치바나(立花)란 필명을 쓰기 사작한 것도 이때였다. 위낙 다양한 내용을 다달이 쓰다보니 잡지사측에서 또 다른 필명을 귄해 기쿠이리 류스케(菊入龍介)랑 필명도 사용했다. 1972년 들어 그는 이스라엘 여행을 떠나 중동지역을 방랑하고 한 여자에게 빠져 수없이 많은 연애편지를 쓰며 마음의 방황도 겪었다. 신주쿠에 스탠드바를 열어 반 년간 운영하기도 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평생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는 확고한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연구'를 계기로 그는 도저히 발을 뺄 수 없을 만큼 언론인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이후 변함없이 외길을 걸어왔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평론가, 논픽션 작가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면서 독자적인 조사보도 방법론을 정착시킨 '특종기자'라는 인상도 많이 지워졌다. 그러나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일상어로 발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죽는 날까지 '기자'로 남을 것이다.
--------------------------------------------------------------------------------- p.188 이 들이 말하는 '다치바나와 같은 사람'은 결코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다치바나, 즉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와 ≪공산당연구≫, 그리고 ≪록히드 재판을 재단한다.(현재 '논박'으로 바뀜-우리나라에 번역이 안됌)≫등의 정치적인 뉴스를 깊이 파고들었던 다치바나의 모습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1980년대 후반 들어 현대과학과 문명의 문제로 지평을 넓혀가면서 폭넓고도 깊은 지식과 교양을 과시한 다치바나의 모습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다치바나의 변신은 1980년대 들어 시작됐다. 이 같은 변신을 통해 그는 '특종기자', '권력과 싸우는 언론인'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일본 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됬다. 그리고 그 변신의 방법은 그 동안의 조사보도 방법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사보도의 대상을 확대한 결과, 심층 과학 저널리즘의 대해로 접어든 셈이었다.
---------------------------------------------------------------------------------- 이 책을 산지는 2004년 12월 18일 토요일입니다. 이 책은 강동도서관에도없었고, 교민문고, (강남, 광화문)교보문고, (종로, 강남)영풍문고, 리브로등 대형서점에서도 절파능로 안 파는 책입니다. 이 책은 반디앤루니스(옛 서울문고)에서 재고가 단 하나밖에 없어 제가 산 다음은, "절판이라 책을 구할수 없음니다"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구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입니다.
한국일보 도쿄특파원이던 황영식씨가 다치바나 다카시에 흥미를 느껴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삶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단 중간 부분은 제가 일본 정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계속 넘겨 보았습니다.)
2005년 정보기술(IT)시장의 기술 변화는 그 어느 해보다도 숨 가쁘게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언제 어디서나 정보통신기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컴퓨팅 환경에 접속할 수 있는 세계`를 의미하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키워드 속에서 2005년 이를 구체화한 서비스와 기술들이 대거 선보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올해를 기점으로 말로만 듣던 유비쿼터스시대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음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특히 IT업계를 중심으로 융합을 뜻하는`컨버전스`가 더욱 가속화, 기술 차원에서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등 방송 통신 융합의 IT 컨버전스 바람이 거세게 불 전망이다. 2005년 IT업계를 뜨겁게 달굴 주요 서비스들을 요약해 본다.
▶DMB=자동차나 기차, 지하철 안에서 TV를 보거나 교통상황 실시간 정보를 받아볼 수 있고, 휴대전화나 개인휴대단말기(PDA) 등에 내장된 수신장치로 TV를 보고 좋은 음질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초특급 통신` 서비스다. 서비스 방식에 따라 위성 DMB와 지상파 DBM로 나뉜다.
휴대전화로 위성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위성 DMB 시범 서비스는 당장 1월 중순부터 개시된다. 5월에는 상용 서비스가 시작되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상파 DMB 서비스도 본궤도에 오른다. 이들 사업은 새해 국내 시장에서의 `화려한 데뷔`가 끝나는 대로 세계 시장으로 본격 진출, 반도체와 휴대전화 단말기에 이은 새로운 `수출 신화`를 일궈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될 정도로 IT시장에서 가장 주시해야 할 신기술이다.
▶와이브로사업도 꿈틀=국내 기술과 표준으로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와이브로`(휴대 인터넷)는 새해 IT업계의 최대 관심거리다.
이동 중에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첨단 서비스로 이동통신망 기반의 무선 인터넷 서비스와 무선랜의 장점을 합친 차세대 유무선 복합 서비스라는 장점으로 시장이 급속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우선 2월로 예정된 사업자 선정을 신호탄으로 업계의 본격적인 정지작업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산업 측면에서는 PDA와 노트북 등의 수요가 창출되고 제품 경쟁력이 제고되면서 무선랜 등 서비스의 활성화도 기대된다. 이용자 측면에서는 동영상과 음악, 학습 등 생활 속의 정보화가 가능하고 개인 구축 인터넷 환경이 확산되는 등의 변화가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무선주파수 인식(RFID)시대 본격화=올해는 국내에서도 `제2의 IT 혁명`을 가능케 할 신성장 동력,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ㆍ무선주파수 인식-전자태그)`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다. 전자태그는 IC칩에 내장된 정보를 무선주파수를 이용해 비접촉 방식으로 읽어내는 차세대 정보통신 핵심기술이다. 상품, 화물, 자재, 유가증권 등 모든 물건과 동식물 등에 부착해 획기적인 비용절감을 가능케 해 우리 생활 전반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기대된다. 예컨대 전자태그가 부착된 물품을 구입할 경우 점원이 계산을 위해 물품 하나하나를 바코드 스캐너로 읽을 필요 없이 쇼핑카트가 센서를 통과하는 그 즉시 물품의 명세와 가격이 산출된다. 특히 미국의 광우병 사건 발생 때와 같이 이를 부착한 쇠고기의 경우 출생부터 유통과정까지 한 번에 알 수 있어 큰 관심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인터넷전화(VoIP) 본격 등장=2005년 1월 인터넷전화에 착신번호 `070`이 부여돼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이 보장된 인터넷전화 서비스시장이 본격 열린다. 인터넷전화는 인터넷망을 이용해 시내외 요금 구분이 없고 착신까지 가능한 기술이다. 이 같은 인터넷전화가 사설교환기(PBX)를 대체할 것이라는 건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대세. IP회선을 이용하는 인터넷전화는 기존 구리선 전화에 비해 비용이 절반 정도 절감되는 장점이 있다. 그러다 보니 소비자뿐 아니라 막대한 투자비 부담 때문에 통신사업에 주저하던 사업자들조차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다.
지난 봄에 나왔던 JP 선배의 '이공계 위기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제언'의 속편 딴지일보와 한겨례신문에 올라왔길래 옮겨본다.
기초학문에 연간 3조를 내다버리자는 주장에 원츄를 날리며~~
어느 물리학자가 보는 이공계 위기의 본질②
0. 들어가며
이 글은 지난 봄에 썼던 “이공계 위기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제언”의 후속글입니다. 전편만한 속편은 없다지만, 그 때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어떻게든 다시 정리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공계 문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사회가 맞부딪히고 있는 여러 가지 갈등과 문제들이 또한 이공계 위기 문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 사회의 총체적인 난맥상이 그 사회의 학계나, 혹은 기초학문 분야에 그대로 투영될 것이기 때문에 저의 이런 생각은 지극히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소간 저의 정치적인 견해가 어떤 형태로든지 이 글에 반영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리 밝혀 두자면, 저의 정치적인 성향은 민주노동당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편입니다.
제 일천한 경험은 서울대 물리학과에서의 11년, 연세대 물리학과에서의 3년 8개월 생활이 전부라서 항상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대한 걱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껏해야 3류 물리학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다는 점 또한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뒤에서 밝힐 여러 가지 견해들은 이런 저의 처지의 산물일 수밖에 없겠지요.
편의상 높임말을 쓰지 않게 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몇 가지 오해들
먼저 이공계 위기와 관련해서 논란이 있는 몇 가지 의견들을 재고해 보자.
1) 시장원리를 도입하라?
이공계 위기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나온 얘기 중 하나가 바로 이공계에 시장의 원리를 도입하든지 아니면 제대로 작동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놈의 “시장원리”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를 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경제학에 문외한이라 시장원리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대략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내용들을 요약해 보자면, 시장주의 = 자유경쟁 = 보이지 않는 손 = 비교우위 = 능력에 따른 댓가 지불 등 이 아닐까 싶다. 나는 특히 이공계인들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왜 그런가? 내가 보기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만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는 주먹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케인즈가 나타나서 국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역설하여 뉴딜정책을 성공시킨 게 벌써 반세기도 훨씬 전의 일이다.
더군다나, 세상은 그리 공정하지가 않다. 자유무역의 전도사인 미국만 봐도 그렇다. 한국과 일본 및 유럽산 철강재에 반덤핑 과세를 매겨서 자유무역의 정신을 훼손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석유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는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믿음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소니의 기술력은 일본 내 중소기업을 등쳐먹으면서 축적된 것들이다. 그대들이 좋은 기술을 가지고서 그대의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고 해서 사장님이 그대들에게 더 많은 월급을 주어야 할 절대적인 이유는 없다.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기본 원리는 시장주의라기보다는 자본의 논리이다. 시장의 원리가 지켜지는 것은 자본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그런 구조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사장님 입장에서야 싼 값에 고급 기술을 충분히 써 먹을 수가 있는데 왜 당신들에게 더 많은 댓가를 지불하겠나. 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좌파적인” 투정이 아닌가. 혹여 이런 자본의 논리마저 부당하고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그대들은 칼 맑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공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시장의 원리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서 한참 빗나가 있다. 왜 이공계 인력이 싸구려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그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이윤을 최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상과제이기 때문에 여타의 제반 비용은 최대한으로 줄여야 한다. 연구원이나 엔지니어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이공계 인력의 전직 제한법은 그 비용을 줄이기 위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겠는가.
물론, 우리는 잘나가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바라보면서 이게 결국 사장님들에게도 궁극적으로는 큰 이득이 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잘 안다. 아마 사장님들도 다 알 것이다. 기술개발 안하면 안 된다는 것, 고급 인력에 후한 대접을 해 줘야 끝내 살아 남는다는 것 말이다. 적어도 경영에 관한 한, 그들은 여러분들보다 훨씬 전문가이다. 그래서 문제는 개별 회사의 사장님이나 간부들의 인식의 문제이기에 앞서서 전체적인 구조에 대한 문제, 다소 천민적인 자본축적 구조의 문제이다.
시장의 원리는 이미 작동하고 있다. 그게 (거대) 자본의 논리에만 충실한 게 문제라면 문제다. 합리적이고 새로운 구조를 위해서라면, 국가가 나서서 때로는 자본의 논리를 오히려 ‘거스르는’ 정책을 펴도록 주문해야 할 처지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는 그런 시장은 세상에 없다.
2) 이공계인의 공급과잉이 문제인가?
표면적으로 보자면 넘쳐나는 이공계 출신들에 의한 공급 과잉과 뒤이은 가격 하락이 맞는 얘기다.
“우리나라 24세 연령자의 이공계 학사학위 취득비율은 8.9%로, 중국 0.9, 일본 7.2, 싱가포르 7.8, 대만 6.7, 독일 8.1, 미국 5.4 보다 높다. ”- [기초연구 중장기 계획 요약 보고서]
“자연과학분야에서도 우리 나라가 불필요하게 많은 학사를 배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리학에 있어서 한국은 2,005명의 물리학사를 배출하고 있는데 우리보다 인구가 거의 6배인 미국은 3,679명으로 우리보다 1.83배만을 졸업시키고 있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수요공급원칙을 무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계산학을 제외하면 한국이 19,356명 일본이 18,489명으로 인구가 훨씬 적은 한국이 일본보다도 많은 이학사를 사회에 내보내고 있다.“ -[제10회 대학교육 정책 포럼: 국가인적 자원 개발을 위한 학문의 균형적 발전 방안]
이 상황이 우리에겐 참으로 답답하지만 기업들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상태 그대로 두는 것. 그러면, 정말 그놈의 보이지 않는 손이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이미 이공계 기피와 그에 따른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으니까.
또 다른 방법은 각 주체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상향 안정화”하는 것이다. 지난 번 글에서도 잠시 밝혔듯이, 값싼 노동력으로 물건 팔아 먹던 시절은 이미 옛날 얘기다. 이왕에 비싼 값을 치를 양이면 제 값어치를 하는 “상품”을 제대로 구매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다. 기업이나 엔지니어나 정부나 다같이 저질 싸구려로 놀던 시절은 이제 마감하고 모두가 고급화의 길로 가야 한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이공계생들이 대학에서 매년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핵심연구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BT 핵심분야인 '인간유전체' 분야에서 국내 인력은 미국의 5%, 일본의 10% 수준에 불과하다.” - [기초연구 중장기 계획 요약 보고서]
놀랍게도 분야에 따라서는 학사출신이 미국이나 일본보다 절대적인 숫자에서 앞서기도 하지만, 박사급 배출인력 숫자는 거의 모든 분야를 불문하고 대략 10:1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한 가지 재밌는 통계를 보자면,
“철학의 나라 독일이 철학사(Magister)를 410명, 철학교육학사를 302명 배출시키는데 비하여 우리 나라는 철학사 1,467명을 졸업시키고 있는 점이다.” -[제10회 대학교육 정책 포럼: 국가인적 자원 개발을 위한 학문의 균형적 발전 방안]
그러나 같은 자료에서 철학박사 숫자는 한국 41, 독일 265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시나 우리 나라에서는 적당히 싸구려 인력들만 대량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기업에서 값싸게 데려갈 수 있는 중급의 인력들은 매우 풍부한 편이다. 이런 공급과잉이 일정정도 지금의 이공계 위기를 야기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중급 인력들이 고급인력으로 양성되는 통로는 매우 협소하다. 대부분이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공계 위기의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닌 질의 문제이며, 단순한 공급과잉의 문제라기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한 전문 고급인력과의 균형의 문제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처우를 개선해 달라?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은 이공계 위기와 관련된 거의 모든 글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말들이 그냥 내던져지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공허한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처우개선의 문제를 보자.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처우개선의 주체와 방식이다. 누가 이공계인들의 처우를 개선해 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그냥 후렴구처럼 처우개선을 들먹이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회사 사장님이 어느 날 갑자기 회사 내 엔지니어들의 기여도에 감복하여 월급이라도 당장 올려 줄까. 아니면 정부에서 이공계 학사 졸업장 가진 사람들에게 연금이라도 지급해 줘야 하는 건가.
처우개선의 관점으로 문제를 보기 시작하면 사장님이나 정책 결정권자들의 개인적 성향에 이공계의 미래를 맡기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의 고민은 그들이 우리의 처우를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사장님이나 정부 고위 관료가 우리의 처우를 개선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사회 구조, 내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한다.
나의 요지는 이공계의 문제를 단순히 표피적이고 현상론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전체의 학문의 문제, 지식 생산의 위기의 문제, 그리고 고급 연구 인력의 부족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번 글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좀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어설픈 중급의 인력들이 다양한 고급인력으로의 진입 통로를 확보하게 되면 상황이 훨씬 달라질 것이다.
나라에서 많은 연구소 지어서 그 많은 공학자들, 과학자들 흡수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공계에 진학한 학생들 중에는 물론 좋은 회사 취직하거나 사업을 벌이는 것이 목표인 경우도 있겠지만, 순수한 공학적 열정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정열만으로 이 길을 택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돈이 아니다. 단지 자기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만 마련되면 된다. 나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입자물리학에 대한 애정과 나름대로의 열정이 나나 내 주위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공돌이”들에게 왜 그런 가슴 뜨거운 열정이 없으랴. 이런 공학도들이, 아톰을 꿈꾸며 우주 왕복선을 꿈꾸며 신소재 혁명을 꿈꾸는 그런 공학도들이 정말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연구를 맘껏 할 수 있는 그런 연구 공간이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기업에서나 정부에서 이런 공학자들 모셔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해야 함이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이공계 문제의 본질을 학문의 위기로 파악하는 것이 결코 원론적이거나 이상적이거나 혹은 멀리 에둘러 가는 게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면서 확실한 방안에 이르게 하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도 마찬가지이다. 애매한 보통 사람들보고 인식을 좀 바꾸라고 할 게 아니다. 그런 사람들의 보통의 인식과 보통의 상식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수의 의식이 바뀌는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부 고위 관료들의 인식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 인식의 변화를 말하고 싶으면 이 양반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 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서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그렇게 실물화된 변화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흔히 말하는 사회적인 인식은 바뀌기 힘들다.
요컨대, 이공계인들이 이 위기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이런저런 주장을 펼칠 때에 우리의 정책적 목표와 대상이 매우 분명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공계 내에서조차 뭔가 합의되거나 통일된 의견의 흐름이 아직 없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인문사회계열 출신들이 이공계를 잘 몰라서 문제이듯이, 우리 또한 한 사회나 국가가 돌아가는 원리를 잘 모르고서 막연하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몇 가지 오해들보다도 내가 이번에 심각하게 제기하고 싶은 한 가지 중요한 “오해”가 있다.
2. 좌파적 평등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
- 평등주의인가 경쟁주의인가?
내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나라 물리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될 성 싶은 한두 명에게 집중해서 지원해야지 나머지 떨거지들에게까지 제한된 자원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에서는 한 명의 천재만 의미 있을 뿐 나머지 백 명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사실 이 바닥에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이런 상식은 꽤나 뿌리가 깊어서 지금 진행 중인 두뇌한국21(BK21) 사업이나 최근 제기되고 있는 최고 과학자 선정 사업 등이 모두 이런 엘리트주의와 관련이 있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이른바 “평등주의”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면서, 학계에서의 조그만 논란거리가 사회 전반적인 이슈들과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 평등주의와 관련된 논의의 근저에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이공계의 문제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지금부터 하나하나 따져보자.
1) 왜곡된 대립구도, “평등주의냐 경쟁주의냐”
평등이라는 말에는 대개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평등에 대한 정확한 사회과학적 의미를 잘 모르는 필자를 용서하기 바란다.) 하나는 “형식적” 혹은 “기계적 의미의 평등”으로서 법 앞의 만인의 평등이나 기회의 균등, 프랑스 대혁명 때 외쳐졌던 평등 등이 여기 해당한다. 대체로 인간의 천부인권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또 하나는 “실질적 평등”으로서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를 이른다. 열 시간 일한 사람이 한 시간 일한 사람보다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이 대체로 지금의 상식적인 사회 정의에 부합한다. 따라서 실질적 평등을 좀 다른 말로 ‘경쟁주의’라고 하더라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부족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이런 의미구분을 해 본 것은 최근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평등주의와 관련된 논란이 다소 엉뚱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평등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형식적 평등의 확대가 실질적 평등, 즉 경쟁주의를 아예 부정하거나 혹은 위축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고교 평준화(=형식적 평등) 때문에 고등학생들의 성적이 하향 평준화되었다든지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 구축 같은 복지정책 때문에 성장 잠재력이 위축된다든지 하는 주장들이 모두 이런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학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최근 확대되는 지방대학 지원에 대해 서울대 등 상위권 대학들은 대학의 경쟁력 약화를 우려한다. 어느 유력 일간지는 하버드가 옥스퍼드를 제친 이유는 바로 경쟁주의 때문이라는 기사를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이 모든 논의는 결국 평등주의냐 경쟁주의냐 하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예각화되며 우리들에게 양자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이런 대립구도를 제기하는 언론이나 집단의 어떤 불순한 정치적 의도, 예컨대 “평등주의=기계적 평등=공산주의=북한의 배급제=좌파정권=빨갱이=···”라는 우리 사회의 파블로프적 연상 작용의 악용 같은 의도도 많이 개입되었다는 혐의가 짙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나는 평등주의와 경쟁주의의 이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굉장히 왜곡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 경쟁주의가 진정한 경쟁을 의미하려면 우선 기회의 균등이라는 형식적 평등이 항상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과외비 천만 원 쓰는 학생과 십만 원 쓰는 학생의 성적차이가 그들의 능력의 차이, 경쟁력의 차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반론을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정권은 형식적 평등의 전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경쟁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평등주의와 경쟁주의의 대립구도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물음을 피할 수가 없다.
첫째, 우리 사회의 형식적 평등 혹은 기회균등은 충분히 실현되고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형식적 평등의 확대가 경쟁의 부정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둘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이 형식적 평등의 과잉에 의한 경쟁의 상실 때문인가, 아니면 소수의 기회독점에 의한 공정한 경쟁의 부재 때문인가?
2) 형식적 평등은 이루어졌는가?
얼마 전 국정감사에서 한 국회의원이 어느 고등법원장에게 “대한민국의 법은 만인에게 평등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매우 부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불법 정치자금으로 재판받은 국회의원에 대한 감형의 사유가 “3선 의원으로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는 점이라고 하니 사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다 나온 거나 마찬가지다. 사회 정의의 최후의 보루라는 사법부 스스로가 “법 앞의 만 명만의 평등”을 시인한 셈이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의 불평등의 문제, 기회 불균등의 문제 중 상당수는 아마 서울대를 빼고서 얘기하기가 힘들 것이다. 내가 이 점을 뼈저리게 실감한 것은 약 4년 전에 서울대에서 연세대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다음은 2001년 3월 기준으로 서울대 물리학과와 연세대 물리학과를 대략적으로 비교한 것이다. 당시 필자의 기억과 인상들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대한민국 랭킹 1, 2위 대학 물리학과의 차이가 이 정도면 지방대 물리학과의 상황을 상상하기가 참으로 끔찍하다. 이 상황을 놓고서 상반된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서울대와 연세대의 실적이나 연구 결과의 차이 때문에 이런 환경의 차이가 생겼느냐 아니면 애초의 부당한 환경 차이 때문에 실적과 결과의 차이가 생기느냐.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설령 아무리 형편없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기관이라 할지라도 정상적인 연구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이런 “넘버2”를 국가나 사회가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와 연세대의 경쟁이 정말 공정하고 의미 있는 경쟁일까. 약 4년이 지난 지금도 연세대 물리학과의 이메일 서버는 조교 학생이 관리한다. 만약 국가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연세대 물리학과에 전문 관리자를 붙여주고 별도의 전산실 공간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그게 경쟁의 포기일까. 아닐 것이다. 아마도 공정한 경쟁을 위한 최소한의 여건 마련이라고 다들 이해해 줄 것이다. 특히나, 사립대의 등록금 의존도가 무려 80% (미국 38.7%, 일본 60.3% ; 나라정책연구회, 1995)에 달하는 한국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형식적 평등과 관련된 우리 나라의 많은 문제들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권세가의 자제들은 갖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군대에도 안 간다. 돈 많이 버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금을 적게 내고 심지어 탈세를 일삼아도 처벌받지 않는다. 힘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금방 용서가 된다. 전두환은 여전히 황제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지난한 민주화의 과정은 사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불평등의 해소, 최소한의 기본권과 기회균등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 머리 모양에서 복장에 이르기까지, 아니 우리 머리 속의 생각 하나하나까지 감시받고 처벌받던 게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87년이 되어서야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다시 뽑게 되었고 파업중인 노동자가 변호사의 도움을 합법적으로 받게 된 것도 97년의 일이다. 호남차별의 상처는 아직도 완치의 길이 요원하다. 우리는 실상 “평등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 시절 우리 사회는 경기고와 서울대와 경상도와 혹은 육사를 나온 사람들이 점령한 그들만의 왕국이 아니었던가.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아야만 했던가.
공교롭게도 그 때 권력의 핵심을 이루던 사람들이 지금 “평등의 과잉”을 외치고 있다. “고려대 나오고도 정치부 기자를 할 수 있느냐”는 말이 여전히 상식으로 통하는 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런 “신분제”가 헌법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고 있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 대통령이 상고 출신이라는 게 비난의 이유가 되고, 같은 민주화 운동을 했으면서도 지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이유가 되고, “부산고만 나왔어도···” 고향에서 왕따 당하지 않을 이유가 되는, 그래도 “나랏님”은 번듯한 고등학교와 명문대학을 나와야만 하고 그런 높으신 분들에 의해, 고려대 나와서는 정치부 기자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그런 높으신 분들에 의해 진급이 막히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 관습법의 나라에서 다행히도 기회균등과 형식적 평등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예컨대 BK21사업은 서울대에 돈을 몰아주자는 애초의 취지에서 한참 벗어나 어정쩡한 나눠먹기가 되었으니 ‘좌파적 평등주의’에 근접한 실패한 사례가 될 법도 하다. 그렇게 또 몰아 준 결과가 어떠했을지 알 수가 없으니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번 사업을 통해 주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성균관대처럼 기회만 주어지면 뭔가 일을 낼 수 있는 역량을 새롭게 발굴해 내는 기쁨을 맛보지는 못했으리라. 아니, 서울대도 ‘경쟁’하지 않으면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교훈이 가장 큰 성과가 아닐는지.
3) 기득권에 의한 기회독점이 가장 큰 문제
정작 우리 사회에서 고질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잠시 돌아볼 때 형식적인 평등의 과잉이 경쟁을 질곡하는 단계는 아무래도 아직 아닌 것 같다. 우리가 그런 감격적인(!) 상황을 언제 한 번 겪어 보기라도 했던가. 오히려 내 생각엔 그 반대가 문제다. 즉, 공정한 경쟁을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기회의 균등, 형식적 평등이 아직까지도 전면적으로 실현되지 않아 소수의 기득권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불공정한 경쟁” 구도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다. 그들은 평등의 과잉을 내세워 경쟁의 부재를 비난하지만 실상은 그들만이 기회를 독점함으로써 기득권 내에서의 경쟁에서 스스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경쟁주의의 가장 큰 적은 바로 평등주의를 배격함으로써 진정한 공정경쟁을 가로막는 그런 사람들이다.
평등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정한 경쟁을 반대하지 않는다. 전교조에서 고교 평준화를 고수하는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의 실현을 위함이다. 나라 경쟁력이 추락하는 것은 평준화로 인한 고등학생들의 실력저하 때문이 아니라 (고등학생들이 공부 좀 못한다고 해서 그게 곧바로 한 나라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지 않는다)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상위권 대학에 진입한 “기득권”이 더 이상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바라는 것은 어린 학생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대학에서 정말 공정한 경쟁을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회를 독점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그로 인한 경쟁력 상실의 책임을 오히려 기회균등의 확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다. 고교 등급제와 관련된 논란의 와중에서 한국 교육의 모든 문제를 일선 고등학교의 부실한 내신관리 탓으로, 혹은 전교조 탓으로 몰아 세운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그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만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통해 기득권이 기회를 독점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재생산된다. 일부 유명 사립대의 고교 등급제도 이런 시도의 일환이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권력세습은 용서되지 않지만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삼성그룹 세습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권력과 학벌과 기득권은 고스란히 “세습”된다.
경쟁주의자들은 항상 이렇게 주장한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잘하는 몇몇에게 집중해야 살아남지 않겠나? 다소간 불공정한 면이 없잖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 ‘잘하는 몇몇’이 정말 잘하는지, 누구나 납득할만한 과정을 거쳐 인정된 몇몇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게다가, 이런 방식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긴급처방이다. 소득 1만 달러까지는 이렇게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은 힘들다. 선진국이 되기 위한 핵심 키워드는 투명성과 공정성이다. 신분제에 버금가는 자폐적인 기득권과 그들에게 집중된 기회, 그리고 이 구조의 폐쇄적인 재생산은 확실히 이런 키워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 사회 기득권이 모든 기회를 독점하며, 스스로의 경쟁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임무를 방기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밝을 수가 없다.
3. 진정 자유경쟁을 원한다면
평등주의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평등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경쟁의 원리를 부정한다고 주장하지만, 기실 누가 과연 진정한 자유경쟁을 외면하는가를 따져 보면 상황은 정반대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하는 서울대부터 먼저 살펴 볼까.
서울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넘버원. 데모하다 잡혀가도 서울대생이라면 전경들한테 덜 맞았던 “특혜”도 누려 봤지만 다음 숫자들 보면 정말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학교수의 27.7%, 국회의원의 37.4%, 100대 기업 대표이사의 43.7%, 검사장급의 75.6%, 노무현 정부 첫 개각 때 장관의 57.9%, 청와대 수석비서관의 92.3%, 1급 국가공무원의 48.2%, 장차관의 63.2% (한겨레 신문).
그런데도 세계 속의 서울대는 정말 비참하다. 중국 상하이 자오퉁 대학 평가 153~201위, 영국 더 타임스 지 선정 119위. 아무리 국가별이 아닌 대학별 랭킹이라지만, 우리 나라에서 1등 먹는 것 중에서 세계랭킹이 이렇게 형편없는 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반도체 메모리 1위, 휴대폰 판매 3위, 외환 보유고 4위, 자동차 생산 6위, GDP 11위. 그렇게 욕 먹으면서 죽을 쑤고 있는 축구 대표팀 피파 랭킹이 이번 달 기준으로 24위다. 피파 랭킹이 아마 50위 밖으로 밀려났다면 광화문에 붉은 악마가 한 5만은 모여서 집회라도 했을 거다.
여러분들이나 나나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왜?
여기서 한가지만은 분명히 하자. 서울대가 이렇게 세계 속의 형편없는 대학이 된 것은 결코 학생들 탓이 아니라는 점이다.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 중에서는 고교 평준화가 학생들의 실력을 하향 평준화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대학에서 정상적인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학생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어떤 주장도 단호히 배격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학의 근원적인 기능이 바로 인재양성이기 때문이다. 정말 훌륭한 대학이라면 좀 못하는 학생들 데려다가 세계적인 인재로 길러내야 한다. 세계적으로 능력 있는 학생들 데려다가 세계적인 인재로 못 키우는 바보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서울대가 자신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고등학교 갓 졸업한 입학생들에게 뒤집어 씌우지 마라. 또 다른 이유는, 정말 뛰어난 학생들 입학했을 때 과연 서울대 랭킹이 100위 안에라도 들었나 하는 의문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적 없다.
흔히 천재들 데려다가 바보 만드는 곳이 서울대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 나라 고등학생들, 요즘 학습능력이 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세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들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고등학생들 성적이 좀 안 좋다고 그걸 곧바로 대학과 국가의 경쟁력 저하로까지 비화시키는 건 지나친 처사이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대학이라는 건 왜 만들었단 말인지. 이런 논리라면 미국은 아마 후진국을 면치 못할 게다. 언론 등에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얘기들 쏟아내면 점잖은 교수님들 나와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바로 잡아줄 만도 한데 오히려 총장님 하시는 말씀이 “고교 등급제를 도입하는 사립대학의 고충을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고매한 교수님들께서 자기 책임을 먼저 통감하기 전에 애꿎은 학생들한테 터무니없는 짐을 지우는 건 아무리 좋게 봐 줘도 “파렴치”의 수준을 넘지 않는 것 같다.
한 집단에 뭔가 큰 문제가 생기면 어찌 되었든 그 집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게 공평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체로 힘 있는 사람들이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킨다. 서울대 문제도 마찬가지다. 서울대가 경쟁력이 없는 이유는 학생들의 학습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서울대 자체의 경쟁력이 뒤떨어진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예컨대, 대학 평가의 주요 기준 중의 하나가 교수당 논문 편수나 인용횟수이다. 학생당 논문 편수가 아니란 말이다.
1996~2000년간 과학기술분야 발표 논문수를 보면 (과학기술부, “과학기술분야 연구실적 분석 연구”) 서울대의 전체 과학기술분야 논문 수는 2,202편으로 세계 55위권. 1위 하버드의 37,932에 비해 약 1/17 수준이다. 1인당 편수는 5.9편으로 하바드의 18.7편은 물론 카이스트 20.6편, 포항공대 13.3편보다 현저히 낮다.
물론, 교수님들도 억울한 면은 있을 것이다. 서울대의 학생 1인당 장서 수는 63.4권으로, 하버드의 694.1권에 비교도 되지 않으며, 우리나라 교수 1인당 학생수(30명)는 미국(15명)의 두 배라는 현실을 고려해야 하니까. 그러나 이런 열악한 현실 개선의 일차적 책임 또한 서울대 교수들에게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 자명하고 명백한 사실을 두고 엉뚱한 곳에서 서울대 119위의 이유를 찾으려고 해서야 말이 되나.
여기서 우리는 서울대 스스로가 얼마나 내부의 치열한 상호경쟁을 통해 전체적인 대학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지 심각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이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른바 “경쟁주의자들”이 단 한번도 서울대 자체의 경쟁력을 의문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누차 얘기했던 대로 그들은 기득권의 상호경쟁을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경쟁주의자들의 “평등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정작 나라가 망해가는 이유는 사회의 중추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경쟁력을 진작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서울대 문제를 가장 일선에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바로 서울대 교수들이라는 점에서 이 집단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경쟁주의”를 논하기 어렵다.
서울대라는 구조를 교수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조로, 그래서 정말 실력있는 사람들만 살아 남을 수 있는 구조로,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경쟁”이 실현되는 대학으로 만드는 데에 서울대 교수들이 얼마나 열과 성을 다했는가.
단적으로 서울대 미대의 김민수 전 교수 예를 들 수 있다. 서울대 미대 교수님들 중에서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 있다고 단지 재인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행정소송에서 이기고도 아직 복직이 되지 않고 있다. 서울대에서조차 실력이나 능력, 업적이 평가의 기준이 아니라는 점은 불행하게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경쟁은 이미 공정하지가 않다. 실력자의 비위를 얼마나 잘 맞추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서울대의 “나태함”은 신입생 선발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난 수년간 정부에서 준비한 수많은 교육개혁 조치들은 사실상 서울대가 거부함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말도 많았던 이해찬 교육개혁안을 예로 들어 보자. 이해찬 개혁안은 교육 전반에 걸친 방대한 개혁 청사진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중에서 대학입시와 관련된 부분이 그 유명한 “한 가지만 잘 하면 대학 갈 수 있다”는 제안이다. 이것은 곧 수능의 자격시험화와 대학의 입시 전형 다양화를 의미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대학입시는 당연히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키고 사교육비를 줄이며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을 여러 각도로 평가하여 숨겨진 재능을 대학이 발굴 육성한다는 취지니까 왜 아니 좋은 생각이랴. 뜻있는 교육 관계자들이 기대를 가졌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곧 엄청난 반대에 부딪힌다. 개혁안으로 가장 손해를 보는 곳은 어디일까. 당연히 서울대이다. 서울대는 입학시험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아주 쉽게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다. 왜냐? 성적순으로 줄세워서 들여 보내면 되니까. 입시 전형이 다양화된다는 것은 대학이 스스로가 학생들을 평가할 여러 가지 기준들과 방식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당연히 바람직한 일이다. 시험 못 보고 공부 좀 못해도 얼마든지 뛰어난 학생들 즐비하다. 이들의 개성 있는 능력들과 잠재력을 끄집어 내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을 대학이 아니면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누가 만들어 낸단 말인가? 서울대는 이게 하기 싫었던 게다. 사실 서울대가 자신에게 부여된 이런 중차대한 임무를 방기했다는 점만으로도 자기반성할 이유는 충분하다. 왜 싫었을까. 이것은 ‘귀차니즘’의 문제를 넘어선다.
우리 나라에서 똑똑함 혹은 유능함의 기준은 서울대 가느냐 마느냐에 의해 일차적으로 결정된다. 그것은 곧 서울대가 우리 사회의 법이요, 정의요, 진리라는 말로 확대된다. 서울대는 서울대가 인정하지 않는 “뛰어남”이 두려운 것이다. 입시 전형이 다양화되면 서울대가 지금까지 제시해 온 똑똑함의 기준이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고 서울대가 제시하지 않는 새로운 똑똑함의 기준, 능력 있음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각 대학들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것이다. 이것은 서울대에게는 재앙이다.
얼마 전에 TV를 보니까 공부는 별로 못하는데도 벌써 축구와 관련된 책을 써 낸 고등학생이 있었다. 축구 전문가들도 이 학생의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이해찬 개혁안이 지금 시행되고 있다면 이 친구는 서울대보다 집에서 가깝고 4년 학비에 장학금에 유학까지 보장해 주는 지방의 모 사립대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느 누구도 이 학생이 서울대 학생들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야 “니가 아무리 축구 전문가래봐야 수능 점수 낮아서 서울대 못 온 주제에···”라고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이 학생은 아마 자격 시험 정도의 수능을 가뿐하게 통과했을 테니까 수능 점수만 놓고 본다면 서울대생과 다를 바가 없다. 예전처럼 학생들의 능력을 숫자로만 매겨버리는 수능점수라는 게 의미가 없어진다. 여기서 서울대의 혼란이 발생한다. 과연 서울대생은 국내 최고의 학생들인가.
학생들의 능력을 다양하게 평가하면 수능점수라는 하나의 획일적인 기준이 일종의 권력 노릇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선발 기준의 다양화는 곧 권력의 분산을 의미한다.
우리 나라의 특성상 서울대가 거부하면 교육개혁과 관련된 백약이 무효다. 당장 그 해 입시가 끝나자마자 “수능이 너무 쉬워 변별력을 잃었다”는 주장이 서울대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조선일보는 연일 관련 기사를 대서특필하며 이해찬식 교육개혁이 학생들을 바보로 만들었다고 퍼부었다. 조선일보 기자의 60%가 서울대 출신이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서울대와 조선일보는 우리 나라의 교육 개혁보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지켜왔던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 더 혈안이 되어 있다. “쉬운 수능”으로 인한 “바보”가 정말 한국 교육개혁의 첫걸음임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권력 해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그 이후에도 줄곧, 지금까지도 쉬운 수능을 거부해 왔다.
이런 식으로 우수한 학생들 싹쓸이 해 놓고서는 이것을 무기로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기회와 재화와 혜택을 독점해 왔다. 서울대와 조선일보는 주장한다. 쉬운 수능으로 학생들 간의 경쟁이 없어지고 그 결과로 능력이 저하되고 그런 학생들을 대학이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많이 뽑으면 대학이 곧 죽는다고. 그러나 임종을 맞이하는 것은 대학이 아니라 서울대의 권위이고 서울대의 독점이며 우수한 학생 데려 오는 것만으로 자신의 임무를 한정하는 서울대의 안일함, 서울대의 폐쇄성이다. 반대로, 점수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절대 다수의 학생들에게는 더 넓어진 선택의 폭과 기회의 향상,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의미한다. 서울대와 조선일보는 경쟁을 말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경쟁하지 않는다.
서울대가 정말 세계적인 대학이 되려면 최고 학생들 손쉽게 데려올 궁리만 하지 말고 첫째로 교수들 사이의 완벽한 경쟁체제를 도입하고 둘째로 좀 모자라는 학생들도 그런 교수들 밑에서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숨겨진 재능이 빛을 볼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한편, 대학 자율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연세대와 고려대가 역설적이게도 이런 서울대와 조선일보의 개혁안 거부에 장단을 맞춘 것은 적어도 지금의 지위를 그대로 확보하겠다는 계산의 결과다. 연세대가 서울대에 비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앞서 각 학교 물리학과를 비교함으로써 그 일단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세대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또 하나의 기득권의 축을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고교 간 실력차 운운하면서 강남권 학생들만 가려 뽑으며 “평등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할 만큼 연세대는 스스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연세대는 타임스 조사 결과 등수에도 없다. 사립대는 돈이 없다고 늘 투정하면서도 “NBA 동문 하나 만들자”는 모토 아래 스카우트비만 10억대라고 하는 하승진 선수 데려 오기 위해 사상 유래없는 파격적인 조건들로 총력전을 기울였다. 내가 있는 연구실(약 15명 규모) 모니터가 볼록한 브라운관에서 LCD로 바뀌는 데에는 무려 3년 반이 걸렸다. 아무리 사립대가 돈이 없다고 해도 연세대는 적어도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누가 믿겠나. 다른 사립대학은 다 문 닫아야 한다. 등록금은 물론 국내 최고 수준이다. 새로 지은 세브란스 병원은 연건평 기준으로 63빌딩을 능가한다고 들었다. 연세우유사업도 있고, 날씨 좋은 주말이면 노천극장에서 대규모 공연이 심심찮게 열린다. 토요일도 늦게까지 연구할라치면 내가 대학에 와 있는지 공연장에 와 있는지 구분이 안 가지만, 그래도 없는 대학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니 이해해 주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신입생들한테 교묘하게 학교 발전기금 걷으려다가 들통나서 거센 반발을 받기도 했다.
나는 연세대로 오고 나서 정말 사립대의 비참한 상황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차라리 기여 입학제 이런 거라도 허용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연세대에서 기여입학제를 추진한 2001년 한해에만 무려 408억 원이라는 기록적인 기부금을 거둬 들였다. 그래도 돈이 모자란다면, 떳떳하게 회계를 공개하든지. 한 학기에 수백만 원의 등록금을 내는 학생들이라면 자기 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최소한의 알 권리는 있다. 모든 사립대가 재단 회계를 공개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1등 사립대라면 이 문제에 대해 이제는 전향적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교육기관이라기보다 학생들 등쳐먹는 장사치”라는 일부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도 있을 테니까.
교수들이 경쟁할 수 있는 체제 역시 여기도 없다. 얼마 전 독문과에서는 교수 임용과정에서의 불공정함과 연구비 유용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교 평준화가 나라를 망친다지만, 정작 대학 내부는 너무나 ‘평등’하다. 서울대와 연세대 물리학과가 그렇게 기막힌 차이를 보이는 데에는, 물론 기본적으로 서울대의 독점 구조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연세대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마인드에도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순전히 공정한 경쟁의 측면에서 보자면, 연세대 교수들의 국내 최고의 연봉도 그 잘난 ‘경쟁주의’를 거스르고 있다. 2003년 정기국회 교육인적자원부 보고 자료에 의하면 정교수 10년차의 연봉이 약 1억500만원이다. 우리나라에서 연봉 1억의 의미는 남다르다. 정교수 10년이면 대략 50대 중후반인데, 그때부터 정년까지 아무 걱정없이 매년 1억 이상 받는다는 얘기다. 참고로, 중국 상하이 자오퉁 대학이 평가한 연세대 세계 랭킹은 202~301위이다. 일선 고등학교에서의 터무니없는 내신 산출과 조작을 탓하기 전에 연세대 내부의 ‘내신’은 잘 챙기고 있는지, 실적에 따라 교수 연봉 재조정하는 진정한 경쟁주의의 성의를 먼저 보이는 건 어떨지부터 먼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연세대의 고교 등급제를 옹호하며 열렬히 평등주의를 비판하고 경쟁주의를 외쳐댄 곳이 바로 조선일보다. 조선일보와 연세대는 연세대 재단 이사장 방우영(전 조선일보 사장)에서 그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뭐 어차피 재단 이사장은 얼굴 마담 아니냐는 일부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하고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하는 우리네 “관습적” 정서에는 뭔가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이겠지만, 지난 김대중 정부 말기에 언론사 세무조사가 한창일 때 유독 연세대 교수들이 조선일보에 방패막이 투고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며칠 뒤 ‘언론자유’를 위한 거룩한 성전을 펼치던 조선일보가 느닷없이 “세브란스 특집” 기사를 무려 두 면에 걸쳐 게재한 적이 있었다 (세브란스는 연대 의대 부속병원이다. 연세=연희전문+세브란스). 아무리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지만 상황이 이쯤 되고 보면 그 놈의 까마귀 신통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 걱정과 염려와 의심 때문에 언론과 사학의 “부적절한 관계”는 단절되어야 한다. 조선-연세 커넥션 자체가 우리 사회의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조선일보는 그 기자의 다수가 서울대 출신이니까, 이로써 우리나라 기득권의 핵심 카르텔은 대충 완성된 셈이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 웃기는 소리다. 서울대 내에서도, 세브란스 병원 내에서도 성골이네 진골이네 하며 뼈다귀 품격 따지는 동네다. 혈통이 아니면, 인간취급도 못 받는다.
서울대 교수의 약 90% 이상이 서울대 출신이다. 연세대는 자교 출신 비율이 약 80% 이상, 고려대는 70% 이상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대학들의 경쟁력이 형편없는 것은 이와 같은 근친교배에 의한 열성 유전자의 재생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국 대학에서는 교수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하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지는 옥스퍼드나 캠브리지가 미국 대학들에 비해 몰락한 이유를 예의 그 평등주의에서 찾고 있다. 이 기사는 물론 조선일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정작 하버드가 성공한 그 경쟁주의 내면에는 동료 교수들의 상호평가 및 강의 평가와 그에 따른 철저한 차별보상이 있었다는 점은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같은 대학에서 교수 진급이 허용되지 않는다. 부교수에서 정교수 되려면 다른 대학으로 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조교수 되면 끝까지 편하게 간다. 나이든 교수님들 친일하셨죠? 정도의 말만 하지 않으면 재임용 탈락하지 않는다. 자기 학교 출신이 많으니까 선후배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이런 전근대적인 구조를 타파하지 않고서 경쟁주의를 논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 카르텔의 한 축을 형성하는 조선일보가 스스로 이런 불합리함을 깨고자 노력하지 않으면서 평등주의를 비난하고 경쟁주의를 주장하는 것 또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 전가임이 분명하다.
누가 과연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을 원하고 있는가. 누가 그 방해자인가. 조선일보여, 서울대여, 그리고 연세대여. 대답하라.
4. 소수의 천재들보다는···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까. 나는 우리나라에서의 기득권에 의한 기회독점이 이공계의 위기와 전면적인 학문의 위기의 또 다른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해결책 또한 소수에게 독점된 기회의 확대와 더 많은 평등, 그를 통한 더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쪽으로 맞춰져야 한다. 추상수준이 좀 다르긴 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세 가지 해결책을 적어 보았다.
1) 고급 핵심 연구 인력의 양적 확대
2003년 초에 있었던 대통령과 일선 검사들과의 대화를 보면서, 격무에 시달리는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고 하는 검사들이 왜 더 많은 검사를 뽑는 것에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틈만 나면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판사나 검사 중에서 시대의 발전을 따라 갈만큼의 해당분야 법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소식인데, 사시 합격 정원 늘리면 많은 부분 해소된다. 이것은 국민들에 대한 법률 서비스 향상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바람직하다.
의료 쪽도 마찬가지다. 의대 정원을 점진적으로 늘려서 인턴이나 레지던트들 고생도 좀 덜어주고 국민1인당 의사 수도 더 늘어나야 국민 보건에 도움이 된다. 시장원리, 경쟁의 원리가 필요한 곳은 바로 이런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식적인 해결책을 여태 제대로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 안다. 해당 업계 종사자들의 기득권 때문이다. 그들은 경쟁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희소가치가 하락해서 권세도 하락하고 수입도 하락하고 사회적 인기가 하락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정책들을 결정한다.
대학 교수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도 대체로 경쟁을 바라지 않는다. 철밥통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교수들은 자기 연구실 문 닫고 들어가면 자신만의 왕국이 기다리고 있다. 의료나 법조계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인적 확대는 교수 사회에서의 경쟁을 유도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교수의 양적 확대는 사실 지금 우리나라 대학이 처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교수1인당 학생 수가 줄어듦으로 인해 교육의 질이 기본적으로 높아질 것이고 행정업무 부담도 그만큼 줄어든다.
무엇보다, “교수”라는 전문가 집단의 양적 확대 자체가 의미가 있다. 전문가나 실력자가 소수인 집단에서는 그들만의 카르텔을 통한 권력독점이 쉽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 개인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하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실 자기 분야의 다른 사람들에 의한 평가가 가장 정확한데, 그럴 사람들이 소수이거나 실력자와 이런저런 관계에 있으면 그 평가의 신빙성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공정한 경쟁은 기대할 수가 없다. 흔히 과학자들 평가 기준으로 제시하는 논문편수나 인용횟수, 아니면 논문 기여 정도 등에 허수가 끼일 가능성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학문 분야에서의 ‘규모의 경제학’을 실현할 때가 왔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잠시 확인했듯이 우리나라의 턱없이 부족한 핵심연구 인력 현황은 이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석사·박사 비율은 학사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대학 교수를 늘리는 것과 아울러서 독립적인 연구기관들 많이 만들어 이런 고급 인력들을 흡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학문하려는 사람들이 적은 이유는 나중에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 상황은 그나마의 고급 인력도 갈 곳이 별로 없는 처지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공계 출신들의 몸값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업계 종사자가 많아지면 그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도 자명하다.
한편으로 정부에서는 이른바 ‘시장’에서 인기는 없지만 국가 전략상 중요한 부문의 인재들을 양성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특히 나는 인문학에 대한 국가의 각별한 배려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역사 전문가의 필요성은 동북공정을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마당에 새삼스러울 게 없으리라 여겨진다. 이것은 사실 민족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가 아닌가. 이 뿐 아니다. 최근 학문의 추세 중 하나가 이른바 ‘퓨전’인데 첨단 공학의 발전이 오히려 인문학과의 결합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인공지능 공학자들은 문화인류학이나 심리학으로부터 인간 행동 양태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기초과학분야에서도 비인기 종목은 많다. 미 펜타곤이 최근 보고한 바에 의하면 향후 20년 내에 가장 큰 안보 위협은 기후 변화에 따른 식량·물·에너지 자원 확보 문제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기상전문가가 도대체 몇이나 될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해양전문가는 또 몇이나 될까. 지난 한일 어업협정 당시 일본은 우리 정부가 우리나라 어선의 포획량을 허위로 산출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자국 인공위성까지 동원해 상세한 데이터를 준비한 바가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지만 지금 우리는 그 외양간이나마 고치려고 하는지 심히 우려스럽다.
인문학이나 기초과학에 국가가 사활을 걸고 달려드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목전의 생존의 문제다. 지금껏 국가가 벌여 온 사업들 생각해 보면 그리 큰 돈이 들 일도 아니지만, 그 중요성이나 전략적 가치로 볼 때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도 이들 분야에서의 핵심인력 양성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율곡의 십만 양병설이 무시된 결과를 잊어서는 안 된다.
2) “제2의 기회”: 소수의 천재보다 다수의 장인을 위한 시스템
최근에 정부에서 발표한 과학기술 정책 중에서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이 이른바 "최고 과학자 선정“ 사업이다. 각 분야별로 뛰어난 과학자 열 명쯤 선정해서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면 노벨 과학상을 머지 않아 수상할 수도 있고 또 일선 연구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사기 진작도 될 것이라는 취지이다.
이렇듯 소수의 엘리트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책이 우리는 낯설지 않다. 그리고 이런 엘리트주의는 예의 그 “평등보다는 경쟁”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나는 이제 이런 정책의 유혹에서 정부나 학계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뿌리 깊은 엘리트주의 정책은 기득권의 독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는 엘리트정책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로지 엘리트주의에만 매달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왜냐.
첫째, 소수에 대한 몰아주기식 사업은 국가 긴급 상황이나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한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소득 2만, 3만 달러의 선진국 진입이나 세계 중심 국가 도약 같은 희망은 이처럼 수공업적인 방식에 의한 인재양성으로는 가당치 않은 개꿈에 불과하다.
둘째, 잠재력 있는 인재들은 포기된다. 우리나라의 인력정책은 비유컨대 바다 한가운데 빠뜨려 놓고 헤엄쳐서 살아 나오는 사람들만 건져 내서 수영 훈련시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도 돈 많거나 빽 있거나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중간에 그냥 구조된다. 반대로 말 잘 안 듣고 입바른 소리만 해대면 아무리 수영 잘해도 중간에 익사당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인재양성’이 아니다. 인재양성이란 말 그대로 능력이 좀 모자라는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자신들의 잠재능력을 극대화하는 과정이다. 단순한 천재선발 콘테스트가 아니란 말이다.
이 결과로 남는 것은 잘해봐야 고분고분한 천재들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윤이상이나 송두율은 그들의 능력과 업적에 무관하게 ‘역적’일 뿐이다. 사하로프나 솔제니친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 재능이 대접받지 못한 억울한 케이스라고 하던 것과 너무나 닮았다. 반대로 평화의 댐을 앞장서서 주장하던 어느 공학자는 그 ‘양심에 따른’ 행동 덕분인지는 몰라도 수년 후 서울대 총장이 되기도 했다. 내 주변에서도 단지 ‘실력자’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물리를 계속할 수 없었던 ‘천재’들이 몇몇 있다. 그들에게 또 다른 제2의 기회가 있었다면 나 같은 3류가 느꼈던 부끄러움이 조금은 덜했을 게다.
셋째, 평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경쟁력 있는 사회다. 천재 한 명이 수천 명을 먹여 살리지만, 정작 메이저리그 84년의 역사를 갈아 치운 것은 타고난 천재 이승엽이 아닌 평범한 연습벌레 이치로였다. 천재가 먹여 살리지 못하는 나머지 99.9%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 보통의 능력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먹여 살린다. 각자의 능력과 수준에 맞게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확보된 사회가 정말 경쟁력 있고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닐까. 그리고 종종 우리는 모차르트보다 더 위대하고 더 감동적인 살리에르를 목격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단지 몇몇 천재의 떡고물을 받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약소한 능력과 재능이나마 최대한으로 맘껏 발휘해서 우리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넷째, 시스템이 인재를 만든다. 우리나라는 유능한 천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만 기다리지만, 대개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보통 사람이 자기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야 정말 위대한 천재들도 빛을 볼 수 있다. 박찬호가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그저 공만 빠른 광속구 투수로 잊혀졌을 게 틀림없다. 메이저 18승 투수는 태어난 게 아니라 선진야구 시스템이 만든 결과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가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되려면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 사람들 데려와서 세계 최고의 인재로 키워낼 수 있는 그런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수준은 그 잘난 ‘한민족’조차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학계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본 같은 경우, 정말 학생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학생들에 비해 형편없지만 일단 그들만의 시스템에 편입되고 1, 2년 지나면 몰라보게 달라진다. 우리가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그들은 나름대로 큰 의미들을 부여한다. 일본식 장인정신이 살아남아 빛을 발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 학계는 정말 살벌하다. 나같이 평범한 3류 물리학자는 경멸이나, 잘해야 동정의 대상일 뿐이다. 다소 충격적이겠지만, 적지 않은 ‘실력자’들이 학생들을 ‘키워낼’ 생각보다는 혼자 공부해서 스스로 똑똑해진 학생이 어디서 굴러 오기를 기다린다. 이런 분위기에서 ‘인재양성 시스템’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해마다 석·박사 학생들은, 혹은 젊은 연구원들은 그 선배들이 해 왔던 똑같은 시행착오를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렇게 뛰어난 천재를 애타게 “기다리건만” 애석하게도 한국 물리학자 중에 아직 단일 논문 인용횟수 1천회 넘는 사람은 없다. 일본에는 10여명 있다. 노벨 물리학상을 ‘예약’해 둔 사람만 서너 명 된다.
어렵게 학문의 길을 선택한 인재마저 조금만 삐끗하면 보따리 싸야 하는 이런 풍토,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는 한 이공계 위기는 극복되지 않는다.
최고 과학자 선정 사업은 대규모적 인재양성 시스템에 대한 고민 없이 소수의 엘리트만을 위해 생각해 낸 대표적인 정책사례이다.
안녕하세요. 태터 툴즈의 개발자인 JH. 본명은 정재훈입니다. 이니셜을 닉으로 쓰다 보니 같은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좀 혼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예전에 purybbs 를 만들었던 사람, 그리고 자막을 만들어서 올렸던 그 사람이 맞습니다.
태터 툴즈는 '뜨개질을 하는 사람의 도구'란 뜻입니다. 글이라는 실과 키워드라는 바늘로 옷을 짜듯이 지식을 담는 스크립트를 만들고자 그렇게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좀 부르기 어렵긴 합니다. 딱 보고 태터라고 하는 사람보다 타터라고 하는 사람이 더 많고...)
아무래도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다 보니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 날밤도 까는 일도 잦았고 특히 2월에는 국제자격증 시험을 연달아 치기도 했고, 번역일도 딜레이 되는 등 매우 진퇴양난이었습니다만, 이렇게 하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어서 매우 기쁩니다.
태터 툴즈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태터 툴즈는 기존 설치형 블로그의 문제점. 그리고 우리나라 블로그 대세를 아예 점유한 서비스형 블로그의 한계를 느끼고 2003년 12월부터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스크립트를 만들면서 생각했던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설치형 블로그의 취약한 연결 기능을 보완할 것 두번째는 블로그를 자신을 위한 지식형 데이터베이스로 활용하는 것 입니다. 이 부분은 '태터 툴즈 무조건 따라하기'에 차차 자세하게 설명이 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설치형 블로그는 사실상 고립무원입니다.타 서비스에 연결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고, 또 그 쪽에서 잘 넘어와 주지도 않아서 설치형 블로그는 설치형 블로그 끼리만 어울리게 되고 그렇게 반복이 되다 보니 좀 매니악한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태터 툴즈는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서비스형 블로그를 쓰면 계정비도 안들고 이미지 업로드도 무제한인 곳도 있고, 굳이 이렇게 따로 설치해서 쓰는 게 아둔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솔직히 홈페이지 운영의 묘미가 바로 그런 '나만의 공간을 고생고생해 가면서 기름치고 조이는'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대형 포탈 사이트에 블로그를 만들어, 검색엔진의 부속품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싫으셨던 분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는 마음에 드는 리눅스 배포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젠투를 창시했다. 내가 리눅스 배포판들에 관련하여 경험했던 것으로 눈에 띄는 것은 전체 시스템을 관리하는 "배포판 도구" (모든 것을 사용하기 쉽게 해 줄 도구) 들이 실제로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하여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것들(배포판 도구)에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시키고 싶었지만 그것들은 내가 하도록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내게 시키는 데 더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그래서 나는 젠투 리눅스를 창시하였고 Portage를 고안하여 이전에 존재하던 도구들보다 더 완벽한 도구가 되게 하였다. 이를 위하여 나는 그것을, 내가 하기를 원하는 것을 허락하는 데 매우 유연하게 만들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하기를 원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게 허락하도록 유연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어떤 패키지가 어떻게 빌드되는지를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한다면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ebuild 파일을 보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만약 빌드되는 방법을 비틀고 싶다면 USE 변수를 활용할 수 있었다. Portage tree에 패키지를 추가하고 싶다면 새로운 ebuild를 만들면 되었다. 새로운 패키지를 사용하고 싶다면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emerge 하면 되었고 의존성은 자동으로 해결되었다.
사람들은 Portage 납嶽?좋아했고 젠투 리눅스는 빠르게 성장했다. 우리는 "소스로부터" 배포판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젠투 개념의 핵심은 "소스로부터" 가 아니다. "소스로부터" 는 젠투의 중요하고 기본적인 측면이며 젠투에 있어 필요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유일한 이슈 또는 가장 근본적인 이슈는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슈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제약없이 하도록 허락해 주는 기술을 고안하는 것이다.
젠투의 핵심을 요약하기 위하여 리눅스 시스템 앞에 앉아 있는 사용자를 상상해 보자. 이 사람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젠투 철학은 이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하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다.
젠투가 태어날 때 쯤에는, 사용자의 명세서대로 소스로부터 패키지들을 빌드하는 쉬운 방법이 부족하다는 것이 방해가 되었다. 현재로서는 그런 것들을 매우 잘 해 낸 상태이지만 별로 잘 해내지 못한 것은 이미 빌드된 패키지들에 대한 지원이다. 비록 태동 이후에 Portage가 거의 모든 바이너리 패키지들을 빌드하도록 지원해 왔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우리의 도구가 바이너리 패키지들을 지원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리눅스 커뮤니티에서 바이너리 패키지들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고 광범위한 요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도구가 바이너리 패키지들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사용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하도록 도구를 고안했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고의로 바이너리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기로 결정한다면 사람들이 특정 문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접근할지에 대한 우리의 의지 또는 관점을 부과함으로써 그들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지를 선택하는 것에 대하여 간섭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바이너리 패키지들을 빌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도구가 실제로 바이너리 패키지들과 잘 작동함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바이너리 패키지들을 빌드할 수 있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의 도구가 바이너리 패키지들에 대해서 잘 작동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이유 외에도 바이너리 패키지들을 만들어야 하는 실제적인 많은 이유들이 있다.
젠투 철학은 한 단락으로 하면 이렇다. 모든 사용자는 자신이 할 필요가 있는 일이 있다. 젠투의 목표는 사용자들이 가능한 한 자신이 보기에 적당하게, 자신들의 일을 유쾌하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구들과 시스템을 고안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구는 기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사용자가 리눅스와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의 풍부함 그리고 자유 소프트웨어의 유연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은 이 도구가 사용자의 의지를 반영하고 투영하며 가공되지 않은 재료(소스 코드)의 최종 형태에 관하여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놓아 두도록 고안될 때만이 가능하다. 만약 사용자가 특정한 방법으로 일을 하도록 이 도구가 강요한다면 이 도구는 사용자를 위하여 기능한다기 보다는 사용자에 반(反)하여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구가 우리에게 자신의 제한된 의지를 부과하는 상황을 모두 경험해 오고 있다. 이것은 퇴보이며 젠투 철학과는 반(反)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젠투 철학은 더 좋은 도구를 창조하는 것이다. 도구가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을 때 여러분은 그것의 존재를 알아채지도 못할 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간섭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을 뿐더러 원치 않을 때 여러분이 자신과 상대하도록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용자가 도구에 봉사한다기 보다는 도구가 사용자에게 봉사한다.
젠투의 장래 목표는 계속하여 이상(理想)에 가까운 도구를 창조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많은 서로 다른 사용자들(아주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용자들)의 필요에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도구는 극히 강력하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해 내는 도구를 발견한다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가? 그것이 위대하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의 임무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센세이션을 제공하는 것이다.
I created Gentoo because I couldn't find a Linux distribution that I liked. The one predominant thing that I experienced with Linux distributions is that the "distro tools" that managed the entire system -- the tools that were supposed to make everything easier to use -- really seemed to want a lot of attention and really got in the way of what I wanted to do. I wanted to tell them what I wanted to do, but they seemed more interested in telling me what they wanted me to do.
So, I created Gentoo Linux, and designed Portage to be a more perfect tool than what had existed before it. To do this, I made it very flexible in allowing me to do what I wanted to do, and also tried to make it flexible to allow others to do what I thought they might want to do.
If others wanted to see how a package got built, they could look at a relatively easy-to-understand ebuild file and learn from it. If they wanted to tweak how it got built, they took advantage of USE variables. If they wanted to add a package, they created a new ebuild for the tree. If they wanted to use a package, they simply emerged it and dependencies were automatically resolved.
People liked the Portage concept, and Gentoo Linux grew rapidly. We have become known as a "from source" distribution, but the heart of the Gentoo concept is not "from source." "From source" is an important and key aspect of Gentoo, and something that was and will continue to be necessary for Gentoo, but it is not the only issue or most fundamental issue. The most fundamental issue is designing a technology that allows us and others to do what they want to do, without restriction.
To summarize the heart of Gentoo, imagine a user sitting in front of a Linux system. What does he or she want to do? The Gentoo philosophy is to allow this user to do what he or she wants to do, without getting in the way.
At around the time Gentoo was born, the thing that got in the way was the lack of an easy way to build packages from source, to a user's specifications. Currently, we've done that very well, but what we haven't done very well is support pre-built packages, even though Portage has supported building binary packages almost since its inception. So we are doing that now.
It's important that our tools support binary packages, because binary packages are widely used and widely in demand in the Linux community. If our tools don't support binary packages, then we can't claim that our tools are designed to allow a user to do anything he or she might want to do. If we purposely choose to exclude binary support, then we are attempting to interfere with how users might choose to approach particular problems, by instead imposing our own will or view of how they should approach a problem. And if we do not build binary packages, then we are not taking any steps to ensure that our tools actually work well with binary packages, nor are we taking steps to ensure that others can build binary packages, nor are we able to *demonstrate* that our tools work well with binary packages. Besides these philosophical reasons, there are many practical reasons to create binary packages.
The Gentoo philosophy, in a paragraph, is this. Every user has work they need to do. The goal of Gentoo is to design tools and systems that allow a user to do their work pleasantly and efficiently as possible, as they see fit. Our tools should be a joy to use, and should help the user to appreciate the richness of the Linux and free software community, and the flexibility of free software. This is only possible when the tool is designed to reflect and transmit the will of the user, and leave the possibilities open as to the final form of the raw materials (the source code.) If the tool forces the user to do things a particular way, then the tool is working against, rather than for, the user. We have all experienced situations where tools seem to be imposing their respective wills on us. This is backwards, and contrary to the Gentoo philosophy.
Put another way, the Gentoo philosophy is to create better tools. When a tool is doing its job perfectly, you might not even be very aware of its presence, because it does not interfere and make its presence known, nor does it force you to interact with it when you don't want it to. The tool serves the user rather than the user serving the tool.
The future goal of Gentoo is to continue to strive to create near-ideal tools. Tools that can accomodate the needs of many different users (all with divergent goals) with ease are extremely powerful. Don't you love it when you find a tool that does exactly what you want to do? Doesn't it feel great? Our mission is to give that sensation to as many people as possible.
저도 설치형 블로그(http://sungdh86.myi.cc/blog)를 쓰다가 문제가 생겨(트랙백이 안됨), 그 문제를 고칠때 까지, 이글루스에 블로그를 마련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른 포털사이트랑 다르게 이글루스가 제대로 된 블로그를 제공하길래 이 곳에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야후도 제대로 된 블로그를 지원함.) 저는 맨 처음 네이버에 블로그를 만들었으나, 리눅스를 설치하고 나서는 리눅스에서는 제대로 안나오고 윈도우에만 잘나오고, RSS기능은 없고, 트랙백기능이 네이버회원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설치형 블로그(pMachine과 Movable Type)를 설치 했으나 문제가 생겨 지금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 (1년계약에 6000원인 계정이 너무 아깝습니다.) 저는 설치형 블로그를 쓰시는 분들을 너무나 부럽습니다. 네이버나 야후, 엠파스나, 파란같은 포털사이트에서 광고 배너의 홍수 속에서, 틀에 갇힌 블로그를 운영하니, 내돈을 주고 광고 없이 내 취향대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이 자유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원문 ------------------------------------------------------------------------------------- 흔히들 말하는, "가입형 블로그는 펌이나 스크랩을 조장하고, 황당한 저작권 조항이 넘치며, 표준 규약을 준수하지 않아 IE를 제외한 브라우저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고, 블로그의 유용한 기능인 RSS나 트랙백이 부실하다"등의 이유 때문에 설치형 블로그를 쓰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치형 블로그를 사용하는 것이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간단해서 쓰는 것 또한 아니다. 일반적으로 MySQL등의 데이타베이스와 PHP와 같은 스크립팅 언어를 지원하는 계정을 구해야 하고, 온라인 메뉴얼을 보며 직접 툴을 설치 해야 하고, 블로그툴이 버전업 되는지 확인해서 업그레이드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 해야 하고, 사용하는 DB와 디스크의 용량, 네트워크 트래픽을 자주 확인하여 계정이 갑자기 차단 되는 경우를 막아야 하고, 긴 URL을 줄이기 위해 도메인을 등록해야 될지도 모르며, 그때 그때 필요한 플러그인을 설치하다 코드가 이리저리 꼬여서 곤란을 겪을 수도 있고, 잘못된 패치나 설정때문에 날아가버린 DB를 복구하며 터져나오는 분노를 삭혀야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치형 블로그를 쓰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가장 주된 이유는 블로그의 요소 하나하나를 나의 취향대로 자유롭게 설정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어느정도의 개인별 설정은 설치형 블로그에서도 가능하다. 각 글의 공개 여부, 스크랩 여부, 자유로운 글의 분류, 블로그 화면의 레이아웃 변경등은 대부분의 블로그들이 지원하는 기능이다. 하지만, 다양한 부류의 사용자들을 수용하고, 또한 서비스의 중단을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가입형 블로그로서는 가입자의 세밀한 요구나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기능 추가에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많은 경우 보안 문제 때문에 스크립트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소스가 공개된 설치형 블로그는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모든 것은 나의 선택과 열정에 달려있다.
우선 글의 내용에 어떠한 제한도 없다. 물론 스크립트를 사용할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좋은 글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원하는 것을 제약없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글에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포함시켜야 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단순히 EMBED 태그나 OBJECT 태그를 이용하여 각각을 열거하는 형식이다. 이런 페이지의 경우 접속시에 모든 플러그인들이 동시에 로딩되어서 종종 웹브라우저를 일정시간 동안 먹통으로 만들게 된다. 하지만, 글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미디어가 동시에 재생이 될 필요가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포함된 미디어에 전혀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런 단순한 방식은 방문객을 짜증나게 하거나 트래픽을 낭비 할 가능성이 높지만, 스크립트를 이용하면, 사용자가 직접 미디어를 보기 원하는 경우에만 플러그인을 로드하도록 쉽게 수정할 수 있다. 나의 의도를 표현하는데 제한이 없다는 점이 글쓰기를 편하게 하는 중요한 기능이 되는 셈이다.
또한 블로그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해와 수정이 자유롭다. 프로그래밍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과 상상력만 있으면 온 세상에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나만의 블로그를 만들 수 있다. 쎄미님의 스태티커는 블로그 내부 구조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재미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가입형 블로그의 경우 시스템에서 지원하는 통계자료 외에는 사용자가 직접 이런식으로 필요한 자료를 얻어 낼 방법이 없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체계적으로 조직되고 분석된 글들이 서로 접점없이 독립되어 있는 글보다 효용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설치형 블로그의 자유로운 수정 기능은 바로 이 "구슬을 꿰는 방식"을 독창적으로 구현 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런 구슬을 꿰는 방식의 예로 태터툴에서 가장 마음에 들고 가장 확장하고 싶은 기능인 '키워드 보기'를 들 수 있다. 카테고리가 수작업으로 생성된 '내용 자체가 연관성이 있는 글들의 집합체'라면 키워드 보기는 자동으로 생성되는 '동일한 단어을 포함하는 글들의 모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기능은 '유사한 의미의 단어를 포함하는 글들의 모임', '유사한 문장을 포함하는 글들의 모임', '유사한 링크를 포함하는 글들의 모임', '유사한 첨부파일을 가지는 글들의 모임'등으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현재 블로그의 글들만을 대상으로 조직화하는 '로컬 키워드' 기능에서 타 블로그의 글들까지 포함하는 '글로벌 키워드' 기능으로 확장된다. 이런 이유로 '글로벌 키워드'가 비록 제대로 활용 되지는 않지만 태터센터의 주된 기능 중에 하나로 계획 되었다는 사실에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글로벌 키워드'가 중앙집중식의 고질적인 문제인 관리와 확장성의 한계를 극복 할 수 없으므로, '로컬 키워드'와 '글로벌 키워드'의 중간 형태, 마치 트랙백처럼, 상대방에게 나의 키워드를 알려주는 '공유 키워드' 형태로 확장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트랙백'이 두 블로그 사이의 1-to-1 채널이라면, '공유 키워드'는 n-to-n으로 확장된 채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확장 가능성이 내가 설치형 블로그를 선호하게 만드는 특징이다.
나에게 있어서, '블로그'란 머리 속에서 정제되지 못한 채 단편적으로 쏟아지는 정보를 쉽게 기록하는 툴이자,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을 가치 있는 정보가 될 수 있도록 섞어내는 '정보의 믹서기'이다. 사실, 이것을 편리하게만 해준다면 그것이 설치형이든 가입형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