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界に一つだけの花의 원작자인 마키하라 노리유키가 부른 世界に一つだけの花(세상에서 하나뿐인 꽃)입니다.
일본에서 최고의 남성그룹이자 국민가수인, SMAP가 부른 곡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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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지 않는 대학생들을 위한 쓴소리
[서평]다치바나 다카시의 <뇌를 단련하다>
김규종(satira) 기자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와 <도쿄대학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상당히 친숙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도쿄대 교양학부 강의를 묶어 출간한 서책이 <뇌를 단련하다>이다. 부제 '도쿄대 강의 ⓛ 인간의 현재'가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역자와 출판사는 연작형태로 번역출판을 지속할 의향인 듯하다.

저자 다치바나는 도쿄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다음 '문예춘추'에 입사하였다가, 2년 만에 그만두고 다시 도쿄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평론활동을 시작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정치와 사회영역 뿐만 아니라, 우주와 뇌 분야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서 탁월한 문필활동을 전개하여 '시바 료타로' 상을 받는 등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일본의 최고 명문대학인 도쿄대학생들의 교양과 지식수준이 너무 낮다는 현실인식에 기초하여 다치바나는 교양학부 학생들이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의 강의를 이끌어나간다. 더욱이 그는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는데, 이런 점은 '일본의 이과교육은 19세기 이전 수준이다', '권위를 의심하라', '스승에게 반기를 들다'는 등의 항목에서 강렬하게 그 빛을 발한다.

"일본 고등학교의 물리와 화학에서 여러분이 배운 것의 대부분은 19세기 이전의 지식입니다. 지금 물리나 화학에서 19세기 이전에 얻은 지식과 20세기 이후에 얻은 지식을 비교하면 9대 1정도라고 해도 좋을 지경입니다. 요컨대, 여러분은 곧 21세기 최전선으로 내던져질 터인데, 여러분의 머릿속은 여전히 19세기 이전의 것들로 가득 차 있고, 20세기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45-47쪽)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입학만 하면 졸업은 당연지사로 여겨지는 일본의 대학풍토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도쿄대학생들을 저자는 날카롭게 비판한다. 대학졸업 후의 사회생활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고 허송세월 하는 젊은이들을 향한 다치바나의 사자후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생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뇌를 단련하다>에 담겨있는 내용들은 나와 같이 인문-사회과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경하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현대사회의 근간을 인류가 20세기에 도달한 자연과학에서 찾고 있으며, 따라서 인문학도에게 보다 폭넓고 정치한 자연과학적 지식습득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제11회 강의내용인 '대칭성과 그것의 파괴'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세상과 우주의 만물을 '대칭성의 원리'로 이해해왔던 과학자들에게 두 사람의 젊은 중국인 과학자가 도달한 결론 '패리티 보존법칙'의 파괴는 관습적인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저자는 '보편성'의 주술로부터 해방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인 진리이자 보편적인 진리다, 하는 것에는 대개 의아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며, 어느 날 전부 전복될 수 있다는 겁니다. 과학의 역사나 인간의 지의 역사도 다 그렇습니다. 역으로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의 역사가 빠르게 생성 발전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따라서 진리라고 알려진 것이 뒤집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356쪽)

여기서 그가 내세우는 전복(顚覆)의 사유는 <뇌를 단련하다> 곳곳에서 독자를 사로잡는데, '강의를 제껴라', '사전을 통째로 읽어라', '유급을 해라', '상식의 벽을 깨뜨려라' 등의 항목에서 그것은 구체적인 내용과 외양을 확보한다.

그는 폴 발레리의 산문 <테스트 씨와의 하룻밤>과 데카르트의 체험을 본보기로 들면서 전복의 사유, 즉 '지적인 쿠데타'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강조한다. 앞으로 전개될 인생을 설계하면서 젊은 날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필요충분조건으로써 인식과 발상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라고 다치바나 다카시는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전환은 모든 연령층의 사람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반하여, 지적인 쿠데타는 열아홉에서 스물세살 사이에 가장 많이 일어납니다. 바로 여러분의 나이입니다. 지적인 쿠데타는 '산고와 흡사한 고뇌' 끝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고통이 전혀 없는, 그리하여 뇌가 늘 태평한 사람들에게는 평생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160쪽)

저자는 깊고도 다채로운 독서와 기록, 사유와 일상적인 실천을 통하여 자신이 도달한 지의 영역을 화려하게 펼쳐 보인다. 인문과학에서 시작하여 사회과학을 거쳐 자연과학에까지 미치는 그의 지적편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교양의 범주를 확산하여 편협한 지식인의 양산이 야기하는 폐해를 줄이자고 호소한다. '프로페셔널한 제너럴리스트', 즉 우리말로 전문적인 '팔방미인' 정도로 자신을 소개하면서도 다치바나는 "과학을 알고있는 철학자"로 불리고자 한다.

그는 스노의 저작 <두 문화와 과학혁명>(1959)을 예로 들면서 20세기에 보다 심화된 미분화와 세밀화 과정을 거쳐 상호이해를 포기한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소통불가능을 지적한다. 문과계 지식인의 반과학적 경향, 기초연구자와 응용연구자 사이의 몰이해, 생산분야 담당자와 순수연구자 사이의 괴리라는 3중의 장벽을 다치바나는 밝혀내는 것이다.

이런 논거에 기초하여 저자는 지난 세기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오늘을 사는 대학생들에게 광범하고 풍요로운 독서를 권장한다.

"사회에 나가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지금의 10분의 1이나 20분의 1로 줄어듭니다. 그제야 학창시절에 책을 좀더 읽을 걸, 하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닌 최대의 자원은 공부 가능한 시간입니다. 지금 그 시간을 배움에 쓰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가장 큰 자산을 무의미하게 하수구에 던져버리는 꼴과 마찬가지입니다." (250-251쪽)

오늘날 영상문화와 놀이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에게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실로 엄중하다. 나날이 늘어가는 현대사회의 과학-기술적인 발견과 진척에 뒤쳐진 채 향락하면서 '지금'과 '여기'에 함몰될 것인지, 아니면, 드넓은 지의 세계로 과감하게 뛰어들어 지식의 생산자이자 수혜자가 될 것인지를 일본의 지식 전문가는 묻고 있는 것이다.



<뇌를 단련하다>, [도쿄대 강의 ⓛ 인간의 현재], 다치바나 다카시,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4년.


2004/03/21 오후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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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테크놀러지가 잉태한 인간의 미래
[서평] <21세기 知의 도전>(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동네약국마다 보통사람에 비해 기억력과 사고력을 2배로 증가시키는 약을 판매하고 있다. 암이 정복된 지 이미 오래고 사람들은 자신의 유전자 특성에 맞춰진 맞춤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다. 심장이나 폐, 신장과 간 등의 장기는 각 개인의 유전자 정보에 의해 간단히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쉽게 이식이 가능하며 인간은 질병으로부터 거의 해방되었다.

첨단 바이오테크놀러지 기술은 의학부분 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다. 석유는 더 이상 고갈되기만 하는 화석 연료가 아닌 특정 미생물이 만들어 내는 반영구적인 자원이며, 완벽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식량문제도 해결된다.....』


위의 글은 50-100년 정도 지난 후의 미래에 관해 잠시 상상해 본 내용이다. 물론 다치바다 다카시가 저술한 <21세기 知의 도전>이라는 책을 읽고 쓴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주로부터의 귀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도쿄생들은 바보가 되었는가>에 이어 이 책은 네 번째로 만나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저작이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책을 읽다 보면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저자의 지식 앞에서 쉽게 주눅이 들곤 한다.

이미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그의 방대한 독서량과 다양한 부분에서의 탁월한 지적능력이 확인된 바 있고, <우주로부터의 귀환>에서는 한 가지 주제에 관한 다치바나의 열정적인 탐구심이 엿보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그의 저작들에서 느껴지는 그의 이미지는 다분히 과학자적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실상 그는 불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문과계열의 지식인이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각 분야에 대한 독학과 엄청난 독서량은 그를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첨단 과학기술의 첨병으로 만들었다.

이번 저작도 이러한 그의 능력이 결집된 책으로서 21세기에 가장 주목받고 있는 바이오테크놀로지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가능성 등을 잘 정리해 놓았다.

이 책은 작가가 한 TV방송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가한 후 방송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한 취재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21세기 知에 관한 체제를 바이오 테크놀러지를 중심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21세기는 컴퓨터 정보과학과 바이오 기술의 시대이다. 특히 인간의 유전자 정보가 완전히 해독되었다는 얼마 전 뉴스에서 우리는 다음 시대에 있어서 바이오 기술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유전자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퍼져 있는 지식 능력의 하락과 이공계 학문에 대한 경원이 그 원인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도 많은 질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공대에서 공부를 하였음에도 어려운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치바나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정말 재미있다. 특히 유전자에 관한 최신 학문들을 소개해주는 부분에서는 거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 정도였다.

뇌의 수용체와 지식의 전달 유전자를 조작하여 만들어진 천재쥐의 이야기나 에이즈 바이러스를 이용한 벡터(유전자의 운반체)에 관한 연구, P53 단백질을 통한 암의 치료와 그 향후 연구과정 등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유전자 치료에 대한 인식의 벽을 깨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유전자 공학이나 유전자를 이용한 연구에 대하여 많은 걸 알려주기도 한다.

특히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유전자가 이렇게 다양하게 이용되고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이다. 또한 키메라니, 염기구조니, 아데닌이니 하는 전문적인 단어가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조금씩 언급되었던 것이라는 사실에 책을 읽는 재미가 배가되기도 한다.

유전자를 이용한 장기복제나 혹은 머리가 좋아지는 약 또는 인간복제에 관한 내용들은 윤리적인 문제를 항상 동반한다. 인간의 윤리상 '유전자를 변형하여 장기를 복제해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인가' 하는 윤리적인 물음은 어찌보면 바이오테크놀러지의 발전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존중과 윤리성에 관한 다양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생명공학 자체는 위험한 판도라의 상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에선 잠시 언급하고 지나갔지만 생명공학과 윤리성의 문제는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할 사항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현재 연구되어지고 실제로 적용되는 바이오테크놀러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각 개인들도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20세기는 시간의 측면에서만 따져본다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인류가 이루어낸 과학기술의 발달 측면에서 20세기는 정말 정신없는 고도의 발전기간이었다. 과학기술의 표면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윤리적인 문제나 종교적인 문제에서 엄청난 변화를 짧은 시간동안 겪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바이오 테크놀러지의 충격에 대비하여 우리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인 대비를 위해서라도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생명과학기술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가까운 미래에 어떤 첨단기술이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에 대한 예측도 필요하다. 그래서 당당히 이 책을 권하고자한다.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www.readersguide.co.kr)의 베스트리뷰로 뽑힌 전제훈(jjolpcc) 님의 글입니다.

2004/01/30 오후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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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경험을 통해본 전문독자의 독서습관

명희복(myunghb) 기자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인으로 세계적인 독서가다. 오랜 기자경력도 겸비하고 있다. 전문기자이면서 전문독자인 셈이다. 쓰기 위해서 읽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읽고 쓰는 것을 동시에 잘 하기는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면 그는 프로 곧 전문가임이 분명하다.

전문독자로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습관은 과연 어떨까? 무척 궁금해질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 바로 독자가 저자에게 갖는 호기심을 해소시켜줄 것이다. 표제자체가 독자의 의문에 대해 어느 정도의 해답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자신의 독서경험을 서술한 내용이라는 것이 쉽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본서는 겉보기에도 적은 분량이라 친숙하게 느껴진다. 구성도 복잡하지 않다. 누구나 목차를 한번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만한 내용인 것이다.

나의 지적 호기심/나의 독서론/나의 서재 작업실론/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우주 인류 책/ 역자후기/다치바나 다카시 등의 순으로 짜여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나의 독서론/나의 서재 작업실론 등 두 개의 장이다.

나의 독서론은 저자자신이 전문기자이자 전문독자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이다. 저자는 때로 하나의 기사를 작성하느라 책장 두 칸 정도의 분량을 읽곤 한다는 사실에서 그의 프로정신을 읽을 수 있다. 완벽성을 추구하는 기자로서의 당찬 기질을 보여주는 일례다.

저자는 책을 사는데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 철저한 인물이기도 하다. 기사를 쓰기 전에 서점가를 둘러보기도 하였는데 저자의 책 선별법은 독특하다. 저자는 책을 세 종류로 구별해서 산다. 읽고싶은 책/재미있는 책/꼭 읽어야 할 책 등이다. 인상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한 권의 책에서 세 가지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아니다'이다. 세 요소를 전부 포함하는 것이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주 부실한 책이 되고 말 것이다. 꼭 읽어야 할 책은 거의 의무감에서 읽어야 하기에 독자에게 희망과 흥미를 동시에 가져다주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자신에게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게 효율적이다. 자신의 업무를 말끔하고 전문성 있게 처리하고 싶으면 꼭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게 낫다. 내용이 딱딱하거나 너무 진지해서 답답하다고 느끼면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게 좋다. 이들 세 종류의 책읽기를 잘 활용하면 평생 신바람 나는 독서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서재 작업실론에서는 소박하면서도 실용주의자적인 저자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독서환경을 저자자신이 체험한 그대로 드러내어 다수가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사과상자로써 책장 및 방을 둘로 나누는 벽으로 활용한 점이다. 기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이외도 저자의 전문독서가다운 면모는 많지만 세 가지만 더 제시하고 싶다.

첫째는 서점에 빚을 감수하면서도 책을 사들일 수 있는 책에 대한 애착이다. 둘째는 무슨 책이든 사면 자신의 손으로 한번씩이라도 넘겨보고 책장에 꽂는다는 점이다. 셋째는 자신이 읽을 책을 반드시 정리해 둔다는 점이다. 비서를 고용해서라도 철해둠으로써 다음 글을 쓸 때 충분한 독서자료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오래도록 독자의 기억에 남을 독서관련서 한 권을 써보고 싶은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는 훌륭한 길잡이 곧 안내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청어람미디어, 2001. 1만 2천원. 306면.
2003/07/28 오후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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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어릴때에는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주셔소 좋았지만, 지금은 선물을 안주신다.
(나는 유치원때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깨 달았다. 어무이가 "산타할아버지가 통장에 계좌이체를 해서, 그 계좌이체한 돈으로 선물을 사주신다."고 하시고 나보고 선물 고르라고 하셨다. 참, 그때부터 산타가 없다는 것을 너무 어릴때에 알아버렸다.)

5시경 1층 선생님께서 컴퓨터를 직접 사신다고 사셨다. 다행이야, 컴퓨터 때문에 골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니...

6시경 종로의 영어 학원에 갔다. 고3 3명이 안왔다. 나이드신 분2분과 대학교 졸업반 언니, 초등학생6학년만 왔다. 그런데 초등학생 6학년은 수업도중에 초등생 어머니가 교실에 오셔서 데리가 가버렸다. -_-

8시 되기 전에 수업이 끝났다.
종각역 근처를 배회했다. 물론, 나혼자. 커플들만 보면 나는 대단히 성질이 난다 그리고 나 마음속에는 이런 말이 튀어나오려고 한다 '이런 연(戀:사모할 련)놈들!!!'

종로에는 커플들이 즐비여 걸어가고 있다. 어디로 걸어가는지는 다르지만. 혹시나 모를까 여관에 손만잡고 잘련지는.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커플들을 분위기있게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두둥

예수를 믿읍시다!!!!

하는 미치광이 예수광신도들(저도 기독교인입니다. 조금 과격하게 써서 전국민의 5분의 1인 기독교인들 정말 죄송합니다. 기독교를 욕하려는 의도쓴 것이 아닙니다.)이 분위기를 깼다.

걸어서 광화문역에 가기전에 교보문고에 갔다.
교보문고에서 카드를 골랐다. 아부지, 어무이에게는 카드를 근하신년(謹賀新年)이 적힌 것으로 샀다. 내동생에게는 UNICEF마크가 찍힌 크리스마스카드를 샀다.

9시 40분 경에 집으로 도착했다.
도착하고 나서는 맨드레이크리눅스 그대로 따라하기를 계속 봤다.

한/영키가 안 먹혀 커널을 업데이트 시킬려고 위의 책을 보았다.

아부지가 내방에 들어오셔서 리눅스에 대하여 물어보셨다. "리눅스와 유닉스의 차이점이 뭐나?"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는 리눅스를 유닉스의 별종으로 취급을 하시는 것 같다.
리눅스가 유닉스의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유닉스와 다르게 소스가 공개되어있다는 생각을 당황해서 말을 못했다.
"잘 모르겠는데예, 좀 더 알아보게습니더."했다.

내가 홍익대 정보컴퓨터공학부에 들어간다고, 아부지가 어려운 것을 물어보면 어떻게 하나?
KT인포텍에 다니는 아부지는 영남대 경제학과 나와도 컴퓨터를 주위 연령대의 어른들보다 컴퓨터를 너무 잘아신다.

나는 아부지가 전문용어를 물어볼때마다 대답을 어떻게 해야되는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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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치과를 갔다.
이번엔 아말감으로 떼운데 오른쪽 윗 어금니를 다시 빼고, 데운데를 깎아 낸 다음 금으로 바꾸는 시술을 받게 되었다.
12월 8일날 받은 시술(떼운 아랫 어금니를 깎은 후 금으로 끼워넣는 시룰)보다는 아프지는 않았지만 28일날에 금으로 끼운다고 하니 그 까지는 임시로 깎아낸 데를 메워준 것으로 지내야 한다...

휴, 이 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도 치과를 8년만에 가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이 것이 내탓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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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DNet Korea 디지털 시대의 선명한 기준(http://www.zdnet.co.kr)에서 퍼 왔습니다.

Stephen Shankland (CNET News.com)
200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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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누스 토발즈가 리눅스의 개발에 수천 명이나 되는 프로그래머들의 재능을 성공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때 아마 가장 타격을 받은 운영체제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솔라리스였을 것이다.



현재 토발즈과 그의 연합 전선은 오랜 경쟁자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썬은 솔라리스를 오픈소스 프로젝트로 바꾸고 솔라리스를 이용하는 프로그래머들의 자체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또한 인텔 제온 프로세서처럼 폭넓게 사용되는 x86 프로세서 장착 컴퓨터에 솔라리스를 탑재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토발즈는 솔라리스의 행보에 그리 개의치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는 솔라리스의 이러한 변신에 대해 “하찮은 일”이라고 평하며 노골적으로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토발즈는 현재 고군분투하고 있는 칩 설계 업체 트랜스메타에서 수년 간 일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앞길이 좀 더 투명한 미래를 위해” 오픈소스 개발 연구소(OSDL)에서 근무하고 있다.

OSDL에서 토발즈는 동료이자 리눅스 커널의 2인자인 앤드류 모튼과 함께 광범위한 전면 개정보다는 기존 2.6 커널에 자주 작은 변화를 주는 새로운 개발 프로세스를 확립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프로세스로 리눅스 커널의 개선 속도가 더 빨라지기를 원하고 있다.

CNET 뉴스닷컴은 솔라리스, 그리고 그의 즉흥적인 프로그래밍 스타일과 같은 몇가지 주제를 갖고 그와 인터뷰를 가졌다.

썬이 이번에 솔라리스의 기술을 개선하고 오픈소스화해 x86 분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썬에 대해서는 지켜보자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말이 너무 많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썬이 이제 방관자적 입장을 박차고 나와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솔라리스 10 베타 버전에 포함된 컨테이너, D트레이스, ZFS와 같은 것들이 그 예다. 또한 썬은 의욕적으로 개발자들과 소프트웨어 업체들을 지원하려 나서고 있으며 x86용 솔라리스 10을 무료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썬이 이처럼 x86 시장에 무게를 두는 것과 솔라리스에 추가된 새로운 기능들을 어떻게 보고 있나?
솔라리스/x86은 실질적으로 말도 안되는 얘기다. 솔라리스는 하드웨어 지원이 매우 부실하다. 행여라도 리눅스가 드라이버를 잘 지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솔라리스/x86을 써보기를 권한다(편집자 주 : 여기서 드라이버는 운영체제가 그래픽 카드나 LAN 카드와 같은 하드웨어와 통신하는 데 사용되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IBM의 스티브 밀은 리눅스 개발 로드맵 중 많은 부분이 앞이 훤히 보이는 고속도로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유닉스의 발자취를 보면 리눅스가 어디로 갈지 보인다라는 의미다. 당신이 보기에 리눅스는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유닉스의 기술을 적용하고 있는 것인가.
난 검증된 개념의 신봉자로 아이작 뉴튼을 매우 존경한다. 아이작 뉴튼은 분명히 지금까지도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 중 한명이다. 그러나 내가 존경심을 품는 다른 이유는 바로 그를 유명하게 만든 언사 때문이다.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를 딛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뉴튼이 실제 생활에서도 괜찮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뉴튼의 그 말은 과학이 무엇인지 구체화한 것이다. 오픈소스도 전 부분이 거인의 어깨에 서 있다는 점, 그리고 다른 분야의 개념과 생각을 점진적으로 개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새롭고 기존과 다른 것을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발명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일 뿐만 아니라 어리석음과 오만의 극치다. 많은 프로젝트들이 이같은 경향을 보이긴 하지만 리눅스 개발 프로세스에서는, 비유하자면 아기를 욕탕에 던지는 것과 같은 일은 하지 않기 때문에 훌륭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이야!(NIH ; Not Invented Here) 신드롬은 병폐일 뿐이다.

리눅스에 대한 근거없는 통념이나 오해 중 특별히 신경쓰이는 것이 있나?
난 쉽게 상처를 입거나 하진 않는다. 그래서 특별히 어떤 것이 그렇다고 말할 것도 없다. 단지 리눅스와 관계는 없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통념이 하나 있긴 하다. 바로 한 사람이나 한 회사가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누군가 꿈을 갖고 ‘계획’했기 때문에 뭔가 이뤄진다는 믿음과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맞다고 믿는 것 같다. 이런 믿음은 자기과신으로 이어진다.

나와 같은 경우 리눅스와 관해 일어나는 일들은 토발즈라는 개인이 제어할 수는 없다고 지속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왜냐면 개발을 이끌어내는 환경 때문이지 특출난 리더들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요인들이 ‘위대한 스포츠 코치’라든지 ‘위대한 정신적 리더’라는 말로 미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속의 영웅 이론에 대해서는 우리도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토발즈 당신은 리눅스에 꽤 큰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IT 산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리눅스가 당신의 입지를 낮춰왔나? 아니면 자존심을 세워줬나?
애초 리눅스를 시작할 때의 포부가 작아지지도 않았으며 리눅스가 나를 초라하게 만들거나 하진 않는다. 리눅스가 지금까지 겪어온 역사를 보면서 나는 영향력 있는 실력자들이 얼마나 환경에 많이 의존하는지, 그리고 그 환경을 만들어왔는지 깨닫고 있다. 현재도 리눅스로 인해 본인의 입지가 좁아지거나 하진 않으며 희망사항이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기반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길 바란다.

물론 개인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은 매우 중요하며 의욕적이며 뛰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 천명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개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돋보이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환경이다. 개인적으로 리눅스가 정말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개인들을 빛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썬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형태로 솔라리스를 내놓으면 검토해볼 것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나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시간도 없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리눅스는 ‘다른 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좀더 개선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솔라리스를 본다고 해서 영감을 얻는 것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확신하건데 솔라리스에 뭔가 특별한 게 있다면 사람들은 나에게 얘기해 줄 것이다.

아까 인용한, 거인의 어깨에 서 있기 때문에 멀리 볼 수 있었다는 뉴튼의 명언을 좋아한다면 솔라리스에도 뭔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본다. 솔라리스를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솔라리스에 뭔가 닮을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반적인 유닉스의 원리를 리눅스에 적용하고 있다. 나는 리눅스가 다방면에서 지금까지 등장한 다른 어떤 시스템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이 있다. 바로 내가 틀렸다 해도 그건 크게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나보다 솔라리스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은 본인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솔라리스의 탁월한 기능에 대해 얘기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내 자신의 범위 내에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가깝다.

앞으로 몇 년 뒤에 리눅스가 유닉스를 시장에서 몰아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디서 영감을 얻을 것인가?
여태까지 영감이 모자랐던 적은 없었다.

뭔가 해볼만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나 아이디어들은 다른 시스템에서 얻은 게 아니라 바로 사용자들에게서 얻은 것이다. 사용자들은 “유닉스가 ㄱ을 지원하니 리눅스도 ㄱ을 지원하면 좋겠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사실 난 저런 얘기를 기본적으로 믿지 않는다. 대신 사용자들이 품고 있는 문제들은 “ㄴ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든가 “이런 방법으로 할 수 있지만 ㄷ 때문에 짜증이 난다”와 같은 얘기로부터 도출된다. 바로 이런 얘기들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장기, 단기 계획을 수립할 때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 토발즈 당신은 즉흥적이고 순간에 충실한 사람이지 5년 걸려 큰 프레임워크를 설계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맞다. 현실적인 틀을 벗어나는 계획은 수립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는 장기 계획이란 것은 좀 애매하고 다분히 직관적인 것이라 설명하기 어렵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 아주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진 않으려 한다. 대신 선호하는 것과 선호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을 가지려 노력한다.

어떤 사람들은 갈피도 못잡고 있다고 혹평할 수도 있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신 유연성이 높다. 향후 5년 내의 어떤 구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잃지 않고 따라갈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견해을 무시하지 않고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뭔가 커다란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가끔씩 두렵기도 하다. 내가 커널 메일링 리스트에서 계속 주장하는 것은 세상을 다시 만드는 게 아니라 작은 걸 변화시키고 큰 변화는 그냥 부수적인 걸로 놔두자는 것이다.

리차드 스톨만의 통찰력이 없었다면 리눅스의 토대임이 분명하며 유닉스를 모방한 GNU 프로젝트와 GPL이 출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톨만이 없었어도 가능했다고 본다. 그러나 질문 자체가 “어떤 인물 ㄱ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됐을까?”라는 부류 같다. 다른 말이지만 어떤 통찰력으로부터 얻은 어떤 흐름이 매우 영향력이 있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다.

자, 그렇다면 아마 리눅스가 나 없이도 만들어질 수 있었겠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답은 분명히 ‘아니다’이다. 대신 BSD 계열 운영체제 중 하나가 성장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어떤 괴짜 학부생이 다른 운영체제를 개발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리눅스가 왜 GPL을 따르게 했는가? 그리고 다음 버전에서 구현하고 싶은 변화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
정말로 라이선스가 딱 두가지 것만 해주길 원한다. 다른 사람들도 코드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 그리고 개선된 내용이 그 방식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게 전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매우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다른 오픈소스 라이선스들조차도 아주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이 기준을 벗어나고 있다. 이런 라이선스들은 개선 내용을 제약할 수 있는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현실적인 틀을 벗어나는 계획은 수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GPL의 다음 버전에 대해 그다지 크게 걱정하고 있지도 않다. 나는 변호사가 아니며 정확한 용어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다. GPL에 있어 유일한 불만이라고 한다면 아주 단순하게 뭔가를 말하려 해도 단어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뭐, 이것은 어떤 법적 상황에도 모두 적용되지 않을까 한다.

커널 개발 프로세스는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제가 커널 2.7의 트리를 열려고 하려는 것일 것이다(편집자 주 : 2.7의 트리는 현 리눅스 커널 버전인 2.6에 근간을 둔 실험용 커널 버전을 말한다). 물론 단순한 희망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아무도 이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꺼내고 있진 않지만 대신 현재 커널 2.6.x의 개발 모델이 실제로 잘 동작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2.7.x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몇 달 내에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믿음은 안정 버전이 개발 버전을 무색하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안정 버전이 그만큼 성숙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쉽게 안정 버전을 등지고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본다.

새로운 프로세스에서는 개선 사항이 리눅스에 더 빨리 반영되는가?
그렇다. 장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새로운 사항에 훨씬 더 빨리 응답한다. 많은 사람들이 항상 2년이나 되는 개발 주기를 싫어한다. 2.6.x에서 쓰레딩 관련 작업을 모두 마무리했지만 배포판 업체들은 2.6.x가 출시되는 걸 기다릴 수 없어 결국 2.4.x로 백포팅하기도 했다.

2.7 트리에는 어떤 변화 사항이 생기는가
미리 알 수 있다면 말하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부류다. 바로 “어떤 것에 의존하는 것들이 같은 방법으로 움직인다고 가정할 수조차도 없을 만큼 기본적인 부분인데 바꾸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전 개발 과정들에는 모두 고쳐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내포돼 있었다. 그러나 손을 대니 코어 인프라스트럭처를 사용해온 커널 내 다른 부분에도 변화를 유발시키는 등 커다란 혼란이 야기됐다.

얼마나 많은 개발자가 리눅스에 기여하고 있다고 추정하는가? 우리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코드에 기여하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사실 이런 견해는 꽤 왜곡된 면이 있지만 사실이긴 하다. 단지 커널만 놓고 볼 때 200~300명 정도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커널 변경 기록을 살펴보면 지난해 약 1000명 가량이 커널에 접근한 것으로 집계되지만 이들 중 다수는 단지 손가락만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숫자는 개발자를 뺀, 즉 품질 보증(QA)과 테스트를 진행하고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의 총합이다.

리눅스 시장에서 레드햇과 노벨이 맹활약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 업체들이 점차 토발즈 당신 대신 ‘리눅스는 이것이다’라고 사용자들에게 정의를 내리는 것에 당혹스럽진 않는지
소비자들과 직접 해야 할 일이 적어진다면 좋은 것이다. 상용 업체들이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이 바로 소비자들과 개발자들 사이에서 창구 역할을 수행하며 이를 통해 순수한 기술적 문제와 순수한 마케팅적 문제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오픈소스라는 법칙으로 인해 바로 상용 업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개발자는 개발자대로 정직하게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리눅스 판매 업체들이 소위 리눅스 기차를 운행한다면 당신은 승객 정도가 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리눅스 업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진 않는다. 그러나 분명 관련 업체에 이와 같은 ‘승객’들이 많긴 하다. 업체들이 그렇게 될 필요도 있으며 사람들은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필요도 있다… 누구든지 그렇게 느낀다면 그는 단지 일개 승객일 뿐이다. 이건 모든 사람들에게 좋지 않다.

데스크톱 엔지니어링과 마케팅 측면에서 리눅스의 한계 요인이 있을까?
이건 복합적인 문제다. 엔지니어링 측면에서 보면 개선할 게 아주 많다는 것이 한계로 작용하고 ‘사용자의 무관심’ 측면에서 본다면 마케팅에서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사용해온 것, 그리고 좋아하는 것에 머무르려는 성향이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지난 수년간 유지돼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가장 큰 한계요인이라고 본다. 기술적으로도 훌륭해도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상용 데스크톱이 중요한 이유다. 도스(DOS), 그리고 이후 등장한 윈도우가 대중화될 수 있었던 것처럼, 더 일반적인 데스크톱 운영체제가 나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몇 년은 더 걸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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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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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1층 선생님 PC를 조립해야 되겠는데...
학원 선생님이 컴퓨터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말씀하는 것 보니 "조립만 하면 금방 되지 않은가?"- 대략 난감하였다.
인터넷을 싸돌아 다니는 중 이 글을 보고 나서는 PC조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집니다.
부탁을 받으면 PC조립을 꼭 해줘야하는데, 대상이 컴맹이라면 PC조립후 고장나면 어떻할지 잘 모르겠네...
http://php.gleam.pe.kr/index.php?pl=86에서 퍼왔습니다.

컴맹에게 PC조립 해주면 안되는 이유

1) 컴퓨터의 문제의 대부분을 하드웨어의 문제로 인식한다. 90% 소프트웨어의 문제이다.

2)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조립해준 사람에게 떠넘긴다. 조립해준 사람이 열심히 고쳐주는 것이 당연하고 무대가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고맙다는 표현도 안한다.

3) 컴퓨터 조립에 관한 지식의 대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컴퓨터 견적을 받은 자신이 컴퓨터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내 컴퓨터가 조립컴퓨터라는 자체 하나만으로 컴퓨터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한다.

4) 컴퓨터에 아주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해결하지 못한다.

5) 조립을 해주면 A/S포함 가격이라고 착각한다.

6) 아는 사람에게 컴퓨터 조립상담 해줄때, 고생스럽게 컴퓨터 부품정보, 가장싸게 파는 곳 등을 알아본 후 견적서를 작성해주면 결국 자기맘대로 컴퓨터산다.

7) 비싼 돈 주고 조립시켜놨더니 빨리 물건이 안온다고 닥달이다. 미리 쥐어 준 돈도 없으면서 새벽 해 뜨도록 부려먹는다... 너무 당연하다 못해 못난 OO이라 생각하거나 제품에 하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8) 아무리 열심히 성심성의껏 해줘도 자신이 지불한 대가는 아깝다.

9) 잡다한 프로그램이 잔뜩 깔려 하드 움직임조차 버거운 컴퓨터가 고장났다고 해서 프로그램정리하고 정상화시키는데 할애하는 시간을 실력없어 고생한다고 폄훼한다.

조립해줘 본 사람은 안다.... 컴맹에게 조립해주지 말아야할 여러가지 이유들을..
무식한 사람들은 역시 단순하다. 사고(思考)의 과정은 모른채 결과로 단정짓는다. 복잡한 문제점을 간단하게 해결해줄수록 본디 간단한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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